몇 주 전 귀한 권사님이 하늘나라로 부름을 받았다. 예수를 모르고 살다가 사고를 당한 막내아들을 위해 애쓰던 중 뒤늦게 신앙을 갖게 된 분이다. 아들의 사고 직후 부군도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아픈 아들을 매일 등에 업어 등교시킨 그분은 아들 졸업 후엔 출근을 도왔다. 예수를 믿으면서 참석한 새벽예배는 돌아가시기 삼 년 전, 낙상으로 거동이 어려워지기 전까지 하루도 거른 적이 없다. 늦은 나이에 예수를 믿었음에도 소천 전까지 30여년간 집사이자 권사로, 여전도회 회장으로 열심히 교회를 섬겼다. 매일 자녀와 이웃을 위한 기도 역시 잊지 않은 분이었다.
부고를 접하고 바로 입국해 장례식장으로 향했다. 도착해 보니 큰따님이 섬기는 천주교회 교우들이 정성스레 장례 절차를 돕고 계셨다. 설명을 들으니 권사님이 교회 출석을 못 하게 된 사이 해당 교회 담임목회자가 은퇴했다고 한다. 교회에서 고령의 권사님을 기억하는 분이 더는 없던 가운데 감사하게도 큰따님이 섬기는 천주교회 신도들이 기꺼이 도움을 줬다고 한다. 이렇게 권사님의 장례식은 사랑하는 가족과 천주교회 신도들의 따뜻한 배려 가운데 잘 치러졌다.
감사하면서도 한편으론 아쉬운 경험이었다. 일면식이 없는 분의 장례 절차를 정성스레 돕는 천주교 신도들을 보며 참 감사했다. 다른 한편으론 출석하지 못하게 된 교인을 완전히 잊어버린 권사님의 교회가 생각나 아쉬웠다.
미국 신학자 타이 키저는 그리스도인의 죽음과 관련해 이런 말을 했다. “하나님의 아들이 무덤에 누워 계셨듯, 우리도 결국 언젠가 이 땅에 임시로 마련한 무덤에 안치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순간에도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떠나지 않으십니다.”
그렇다. 예수는 삶과 죽음을 막론하고 우리와 하나가 되기 위해 이 땅에 왔다.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께서 스스로를 낮춰 인간의 몸에 잉태되고 태어났다. 그분이 아기에서 어른으로 자라나 죽기까지 한 모든 일은 온전히 우리와 하나가 돼(빌 2:7) 우리의 질고를 지기 위해서였다.(사 53:4) 하나님은 무덤에서까지 우리와 하나 됨을 친히 보인 그리스도를 무덤에 버려두지 않았다.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겠다고 한 주님의 약속은(시 16:9~11) 그로부터 천 년 후 예수의 부활로 성취됐다.(행 2:27) 이는 예수와 하나 된 우리 또한 다시 살리겠다고 한 약속을 확증한 셈이다.(요 6:40)
“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에서 나오게 한즉 너희는 내가 여호와인 줄을 알리라.”(겔 37:13) 이 약속을 준 하나님의 아들이 친히 우리와 하나가 돼 죽음에 이르는 그 길을 갔고 또 승리했기에(히 2:14~15) 더는 죽음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롬 6:5)
그리스도인에게 무덤은 죽어서도 성도가 그리스도와 하나임을 말해주는 터다. 살든 죽든, 시신이 무덤 속 흙으로 돌아가든 불태워지든, 그리스도인은 여전히 그리스도와 하나다. 그와 함께 죽고 또 그와 함께 살 소망을 갖는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에겐 마음을 새롭게 할 힘이 있다. “…어찌하여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눅 24:5) 권사님의 장례를 그분께서 섬기던 교회가 보살피지 못한 아쉬움이 있지만 예수 안에서의 생명과 부활의 소망은 그런 아쉬움이 머물 자리를 절대 허락지 않는다.
박성현 (미국 고든콘웰신학대학원 구약학 교수·수석부총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