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여기저기 SOS를 치고 있지만, 미국은 20세기 초 세계 최고의 조선 강국이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이 U보트로 영국행 미국 보급선을 파괴하자, 미국은 파괴되는 수 이상의 수송선을 빠르게 만들어 이를 상쇄했다. ‘자유의 선박(Liberty Ship)’으로 불린 이 수송선은 1941~45년 무려 2710척이 만들어졌다. 가성비를 갖춘 1만t급 화물선을 열흘에 한 대꼴로 만든 셈이다. 이를 가능케 한 것은 미 조선업의 높은 기술과 숙련된 노동력이었다. 하지만 이런 경쟁력은 아이러니하게도 정부의 과보호로 사라졌다. 미 연안을 운행하는 선박은 미국에서 만든 국적선으로만 해야 한다는 존스법(1920년 시행)은 서서히 조선업의 경쟁력을 갉아먹었다. 정부가 독점을 허용하니 조선소들은 기술 개발과 설비 투자를 게을리했고, 인건비 부담은 갈수록 커졌다. 그 결과 미국은 세계 시장에서 경쟁력을 완전히 상실했고, 현재는 자신들이 만든 군함조차 제때 수리할 능력이 없는 처지가 됐다.
미 조선업의 몰락은 한국에 기회가 되고 있다. 2010년대 중국의 저가 공세에 밀려 위기를 겪었던 한국 조선업은 최근 새로운 전성기를 맞고 있다. 선박 제조 주원료인 후판 가격 하락과 세계 최고 기술력을 가진 친환경 선박 수주 증가에 더해 미 군함 시장은 K조선의 미래 먹거리로 떠오르고 있다. 한국 조선사가 초기 진입 중인 미 군함 유지·보수·정비(MRO) 사업 전망도 밝지만, MRO를 넘어 1000조원이 넘는 군함 건조 시장은 전례 없는 새 시장이다. 현재 미 군함은 자국 조선소에서만 건조할 수 있지만 이를 한국 등 동맹국에 맡길 수 있도록 하는 법안이 미 의회에 계류 중이다. 자국 설비와 기술력만으로는 해군력 향상 사업 자체가 불가능하기에 법안 통과 전망은 밝은 편이다.
트럼프도 인정한 한국 조선업이 초슈퍼사이클에 올라탈 기미가 보이면서 국내 조선 2강도 분주히 움직이고 있다. 한화오션은 지난해 8월 국내 최초로 미 해군 MRO 사업을 수주했고, HD현대중공업은 최근 미 최대 방산 조선사인 헌팅턴 잉걸스와 함정 동맹을 체결했다.
K조선의 이런 좋은 분위기에도 옥에 티가 있다. 한국형차기구축함(KDDX) 사업을 둘러싼 ‘집안싸움’이 그것이다. KDDX 사업은 단순한 함정 도입 사업이 아니다. 국내 기술만으로 처음 건조하는 구축함 사업으로 대한민국 방위산업의 미래를 가늠할 리트머스 시험지 격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HD현대와 한화오션의 과열 경쟁으로 1년 가까이 지체되고 있다. 개념설계와 기본설계 수주를 하나씩 나눠 가진 두 회사는 현재 KDDX 상세설계 및 선도함(1번함) 건조 사업 방식 결정을 놓고 갈등을 빚고 있다. HD현대는 기본설계를 한 업체가 1번함 건조를 맡는 관행에 따라 수의계약을 해야 한다는 입장인 반면, 한화오션은 HD현대가 설계 입찰 과정에서 위법을 저지른 만큼 경쟁 입찰로 이를 결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문제는 결정 장애에 빠진 방위사업청이다. 민간기업들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과열 경쟁하는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정부의 역할은 이런 갈등을 조정하고 논란을 잠재우는 것인데 방사청은 지금까지 함량 미달이다. 수십년간 넘쳐나는 방위 예산을 이 업체 저 업체 주면서 인심만 땄을 뿐, 정작 이런 심각한 사안을 해결한 능력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방사청은 이를 결정할 방위사업기획관리 분과위원회를 수차례 개최하고도 결론을 내리지 못하면서 논란을 키우고 있다. 미국의 조선업이 작은 입법(존스법)에서 망가졌듯이 미래지향적인 KDDX 사업이 한국 조선업의 발목을 잡을 수 있다는 점을 방사청이 알았으면 좋겠다.
이성규 산업1부장 zhibag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