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보험회사 고객센터에 근무하는 상담원은 전화를 받지 않는다. 그는 청각장애인이다. 대신 모니터 속 채팅창으로 고령의 고객과 대화하고, 수어 영상으로 청각장애인 고객을 응대한다. 그는 고객의 불안, 불만, 머뭇거림을 누구보다 섬세하게 읽어낸다. 자신이 경험한 ‘이해받지 못함’의 감각이 고객의 문제를 더 잘 읽어내는 깊은 ‘공감’의 능력으로 이어졌다.
2024년 말 기준 우리나라 등록장애인 수는 약 263만명으로 전체 인구의 5%를 넘는다. 이 중 절반 이상은 65세 이상 고령층이며, 88%는 후천적 원인에 의해 장애를 겪게 된 사람들이다. 다시 말해 장애는 특수한 누군가의 이야기가 아니라 ‘누구나 경험할 수 있는 상태’다.
그러나 우리 사회의 장애인 고용 현실은 여전히 개선이 필요하다. 현행 법령은 50인 이상 민간 사업장에 대해 3.1%의 장애인 의무고용률을 규정하고 있지만 2023년 기준 민간 기업의 평균 고용률은 2.99%에 불과하다. 특히 대기업은 2.43%로 더욱 낮은 수준에 머물러 있다.
보험업계도 예외는 아니다. 1999년 청각장애인 교사의 보험 가입 거절 사건이 보도되면서 보험업계의 장애인 차별 문제가 사회적 이슈로 떠올랐다. 이후 금융 당국은 장애인 보험 공통계약 심사 기준을 마련하고, 생명보험사들은 전용 상품을 잇달아 출시했다. 2007년 장애인차별금지법 제정, 2018년 장애고지 의무 폐지 등 실질적 접근성을 높이는 정책도 이어졌다. 그러나 보험회사 조직 내부로 시선을 돌려 고용 측면을 살펴보면 여전히 아쉬움이 크다. 2022년 기준 국내 주요 보험회사의 평균 장애인 고용률은 1.76%에 불과하다.
반면 해외 보험회사들은 장애인 고용을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경영의 핵심 과제로 인식하고 적극 실천하고 있다. 미국의 AIG, 처브(Chuub) 등 18개 보험회사가 장애평등지수 최고점을 받았고, 영국의 아비바(Aviva), 취리히 UK 등은 장애인 친화기업 인증 최고 등급을 획득했다. 이들 기업은 단순한 채용을 넘어 인식 개선 교육, 의사결정 체계 재구성, 근무 환경 정비, 조직문화 혁신 등 전방위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관련 연구에 따르면 장애인을 고용한 기업은 브랜드 신뢰도, 조직 혁신성, 재무 성과 측면에서도 긍정적인 결과를 보이는 것으로 나타났다.
다행히 국내 보험업계에서도 긍정적인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지난해 한화생명이 업계 최초로 장애인 고용률 3.2%를 달성하고, 경제적 자립을 지원한 공로로 고용노동부의 ‘트루컴퍼니상’을 받았다. 이는 포용적 조직문화의 실현 가능성을 보여주는 고무적인 사례다.
장애인 고용은 사회적 의무 이전에 조직의 가능성을 넓히는 일이다. 우리가 ‘제약’이라 여겼던 특성은 때로는 가장 필요한 ‘역량’이 된다. 장애인 고용은 단지 수치를 채워야 하는 문제가 아니라 조직이 놓치고 있던 감각을 회복하는 일이다. 그것은 조직을 더 유연하게 만들고, 사회를 더 단단하게 하는 가장 실용적인 방법이다. 특히 장애인의 조직 내 참여는 보호자와 공동체를 포함한 다양한 이해관계자의 시각을 조직에 유입시켜 상품과 서비스 혁신은 물론 상생의 선순환을 이끄는 기반이 된다. 이에 기업은 채용 편의 제공, 근무 환경 개선, 경력 개발 보장 등 포용적 제도 개선에 적극 나서야 하며, 정부도 실효성 있는 인센티브로 이를 뒷받침할 필요가 있다.
4월 20일은 장애인의 날이었다. 장애인 인식 개선과 권리 보호를 위해 제정된 이날은 우리 사회의 포용 수준을 점검하는 기회이자 앞으로의 방향을 함께 모색하는 출발점이 돼야 한다. 매년 돌아오는 형식적인 기념일에 그치지 않고 보다 넓은 포용을 실천하는 ‘장애가 장해가 되지 않는 사회로 가는 첫걸음’을 내딛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안철경 보험연구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