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센인과 쌓은 ‘소록도 34년 우정’… “지금 우리는 가족입니다”

입력 2025-04-22 03:06
섬김과나눔회(섬나회) 봉사자들이 지난 14일 전남 고흥 소록도에서 한센병 환우들에게 줄 전복죽을 쑤고 있다.

환자와 봉사자. 둘을 떠올리면 후자는 도움을 주며, 전자는 도움을 받는 모습이 자연스레 그려진다. 그런데 신학생 시절부터 백발이 성성한 중년이 될 때까지 오랜 시간 ‘한센인의 섬’ 소록도를 방문하는 이한덕(65) 목사와 한센인 사이는 그런 생각이 고정관념일 뿐이라는 걸 보여준다. 이 목사는 ‘섬김과나눔회(섬나회)’를 세워 30년 넘도록 1000명이 넘는 방문단과 함께 한 해도 거르지 않고 ‘특별할 거 없지만 꾸준한 만남’을 이어오고 있다. 그는 지난 14일 소록도 방문에 동행한 기자에게 “부모나 형제를 만나러 가는 것을 1~2년만 하고 마는 사람이 없는 것처럼, 우리도 그들을 위하는 것이 아닌 그저 만나러 가는 것”이라고 웃었다.

켜켜이 쌓은 34년간의 우정

28명의 소록도 방문단은 이날 오전 7시 인천 계양역에 모여 버스에 타는 것으로 일주일간의 일정을 시작했다. 남쪽으로 끝없이 7시간을 달려 전남 고흥군 고흥읍 소록대교에 다다랐다. 오랜 시간 외부와 단절됐던 작은 섬과 세상을 이어주는 이 대교를 지날 때 방문단 얼굴엔 들뜨고 설레는 마음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특히 어린 아이들은 멀리 사는 친척 집에 놀러 가는 듯 기대에 부풀어 재잘댔다.

섬나회 시작은 34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신학생 1학년이던 1991년 소록도 봉사를 다녀온 뒤 이 목사의 마음에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동생들이냐”(마 12:48)는 말씀이 강하게 남았다. 그해 9월 섬나회를 설립했다. 단체의 근본이 되는 사역은 매년 네 차례 봉사자들과 소록도를 찾는 것이다. 지금까지 그와 함께 소록도에 가 본 방문단은 1000명이 훌쩍 넘는다. 상당수가 일회성이 아니라 지속해서 소록도를 가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동안 한센인을 방문한 총인원 수는 더 많아진다. 이 목사는 “우리는 봉사라는 말을 절대 쓰지 않는다”며 “방문단은 한센인들과 우정을 쌓는 것일 뿐”이라고 강조했다.

“엄마, 아들” 부르며 가족 연 맺다

미용 봉사자가 섬 주민을 위해 파마를 해주고 있다.

이번 방문단은 소록도중앙교회(김선호 목사)에 숙소를 꾸렸다. 이날 오후 2시쯤 도착해 짐 정리를 할 때 교회로 섬 주민들이 하나둘 찾아왔다. 방문단이 반가워 인사하러 온 것이었다. 안부를 묻는 모습은 오랜만에 가족, 친척과 만나는 모습과 다를 바 없었다. 이름 대신 “엄마” “아들” “딸”이라 부르며 서로를 향한 애정을 드러냈다.

이번 방문단 중 한 명인 이경자(80) 권사는 가슴으로 낳은 ‘소록도 아들’과 시간을 보냈다. 17살에 한센병으로 이곳에 들어온 남양우(53)씨였다. 두 사람은 34년 전 봉사자와 환자로 처음 만났고, 이후 엄마와 아들로 서로를 부르며 안부 전화를 하고 챙긴다. “양우는 내가 배 아파 낳지만 않았지 아들과 다름없어요. 나이가 들어 아무리 힘들어도 양우를 보기 위해 꾸준히 소록도를 방문하고 있어요.”

이 권사는 한 달 전 암 수술을 받아 절대적인 안정이 필요했지만 아들을 보고 싶다는 생각에 이번에도 소록도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남씨는 “엄마가 건강하기만 하면 된다”며 “안 아팠으면 좋겠다”고 했다.

방문단은 첫날 짐을 풀자마자 미리 사 온 전복 45㎏을 씻는 데 힘을 모았다. 마을 주민에게 나눠 줄 전복죽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숙소 다른 한쪽에선 미용 봉사를 위한 준비가 한창이었다. 무료로 파마를 할 수 있다는 소식에 예약은 순식간에 꽉 찼다.

새벽예배·전복죽으로 전한 사랑

봉사자들이 전복죽을 용기에 담는 모습.

이튿날인 15일 방문단은 오전 3시30분 새벽예배를 시작으로 하루를 열었다. 예배를 마친 뒤 주민을 위한 300인분의 전복죽을 쑤었다. 완성된 음식을 포장해 3명씩 9개 조를 꾸려 6개 마을로 흩어져 초인종을 누르며 주민 손에 일일이 음식을 배달하며 인사를 나눴다. 소록도에는 현재 400명 한센인이 산다. 신규 발병자가 거의 없어 주민 대부분은 70세 이상 고령이다.

한센병을 앓는 남편과 10년 전 소록도에 정착한 김낙선(가명·80)씨는 죽을 받아들고는 연신 고마워했다. “잠깐이라도 쉬다 가라”며 집 안으로 방문단을 이끌었다. “환대해주셔서 감사하다”는 감사 인사에 김씨는 “안 그래도 외로운데 이렇게 찾아와 주니 고맙다”고 화답했다. 한센인 이종철(가명·76)씨는 “젊은 사람들이 찾아와 웃어주고 손을 잡아주니 세상이 달라진 것 같다”고 했다.

봉사자들이 독신 가구에게 죽을 배달하는 모습.

과거보다 인식이 많이 나아졌다고 하지만, 한센병에 대한 오해와 두려움은 여전하다. 그렇기에 소록도에 직접 방문한 이들이 ‘그들도 우리와 다르지 않다’는 편견을 깨는 모습을 볼 때 이 목사는 큰 보람을 느낀다고 했다. 그는 “34년간 우리가 베푼 사랑보다 받은 사랑이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크다”며 “우리를 가족같이 편하게 대해주시는 것이 감사할 따름”이라고 했다.

72년 차 소록도 주민인 남재권(83) 장로는 “섬나회가 올 때면 섬 전체에 활기가 돈다”며 “긴 시간 꾸준히 방문해주는 이들 덕분에 덜 외롭고 힘이 난다. 소록도는 여전히 한센인들의 삶의 터전이자, 우리 사회가 함께 품어야 할 공간”이라고 강조했다.

소록도=글·사진 유경진 기자 ykj@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