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굴릴 곳? 눈 돌려라!

입력 2025-04-21 23:14
게티이미지뱅크

30대 직장인 전모씨는 최근 트럼프발 관세 전쟁에 증시 변동 폭이 커지면서 환매조건부채권(RP)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증시 변동성이 잦아들 때까지 돈을 잠시 묶어둘 피난처가 필요했는데, 주변에서 RP를 추천했기 때문이다. 알아보니 ‘단기 여유자금 예치’, ‘단기간 고금리 제공’ 등으로 인기가 많았다. 전씨는 카카오뱅크 증권사 금융상품 투자 서비스에 등록된 한국투자증권의 RP 특판 상품에 가입했다.

시장 불확실성 피난처로 제격

RP를 증시 피난처로 삼은 건 전씨만이 아니다. 서학개미(미국 시장에 투자하는 개인투자자) 이모씨는 “요즘 같은 장엔 ‘현금이 왕이다’는 말이 괜히 나오는 게 아니다”며 “처음엔 예수금으로 들고만 있었는데 시장이 다시 회복될 때까지 소소하게 일당이라도 벌자는 생각으로 RP에 넣어 놨다”고 했다. 그는 “현금을 효율적으로 굴리면서 매수할 타이밍을 보고 있다”고 덧붙였다.

RP는 증권사가 일정 기간이 지난 뒤 이자를 더해 되사들이는 조건으로 개인, 법인 등에 판매하는 채권이다. 하루 이상만 예치해도 이자를 받을 수 있어 환금성이 높다. 정해진 이자율로 수익금을 지급해 매력적인 단기투자 상품 중 하나로 꼽힌다. 국채 등 우량 채권에 주로 투자해 안정성도 높다. 일주일에서 3개월 내외의 단기 투자 상품도 쉽게 찾아볼 수 있어 돈이 오래 묶일 염려도 적다.

21일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증권사의 대고객 RP 매도 잔액은 지난 2월 기준 101조840억원으로 집계됐다. 2021년 10월(102조808억원) 이후 가장 많은 수치로 지난 1월에 이어 두 달 연속 100조원 이상을 기록했다. 지난해 12월(90조8938억원)과 비교하면 10조 넘게 증가했다. 대고객 RP 매도 잔액이 늘어났다는 것은 고객들의 RP 매수가 증가했음을 의미한다.


전문가들은 시장 변동성이 커지면서 안전자산 선호 심리가 강해진 영향으로 설명했다. 이와 함께 짧은 기간이나마 ‘안전 마진’을 확보하려는 이유도 있다고 분석했다. 서울 강남 지역의 한 증권사 프라이빗뱅커(PB)는 “증시 변동성이 커지면서 추가 투자를 보류하는 상황에서 투자금을 채권 투자나 RP 등 현금성 안전 자산으로 옮기는 이들이 늘고 있다”고 말했다.

포트폴리오 변화에 보수적인 자산가들도 현금성 자산 비중을 늘리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국민일보가 한국투자증권에 의뢰해 이 증권사 계좌에서 10억원 이상 굴리는 자산가들의 포트폴리오를 1년 전과 비교(지난 15일 기준)한 결과 주식(-2.0% 포인트), 채권(-0.6% 포인트), 신탁(-0.2% 포인트)의 비중은 줄어든 반면 펀드(+1.5% 포인트), RP(+0.5% 포인트) 비중은 증가했다. 한국투자증권 관계자는 “보통 자산가들은 포트폴리오 비중 변화를 크게 가져가지는 않는 편”이라면서도 “시장 변동성이 커지면서 대기 자금을 단기 투자로 돌리는 수요가 어느 정도 늘어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예테크족에게도 인기

RP는 금리 인하기 ‘예테크족(예금+재테크)’의 눈길도 끌고 있다. SNS 등에서는 ‘이율 낮은 예금 대신 RP 가입’ 등의 제목으로 가입 후기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지난해 말 한국은행의 기준금리 인하가 시작되면서 은행권 정기예금 금리는 연 2%대로 낮아진 상황이다. 1개월 만기 상품은 연 1%대 상품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반면 RP는 정해진 기간 동안 맡겨 놓으면 만기에 원금과 이자를 챙길 수 있다는 점에서 은행의 예·적금과 유사하지만 은행보다 금리가 높다. 수시입출금형 원화 RP 기준 주요 증권사의 평균 수익률은 연 2.25~2.5%로, 연 0.1~0.2% 수준인 은행권 수시입출금 계좌보다 수익률이 높다. 약정형은 이보다 더 높은 수익률을 보장한다. 외화 RP(달러 기준) 역시 한국보다 높은 미국 금리를 적용받아 좀 더 수익률이 높다.

증권사들도 RP 특판 등을 내놓으며 고객 모시기에 나섰다. 한국투자증권이 카카오뱅크와 제휴해 내놓은 RP 상품은 원화 61일물로 시중 예·적금보다 높은 연 7% 금리를 제공한다. 출시 1주일 만에 한도 소진으로 매진될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한국투자증권은 중개형 개인종합자산관리계좌(ISA) 고객을 대상으로 연 4.2% 수익률의 RP도 특판하고 있다.

하나증권은 토스뱅크와 연계해 최대 수익률 6%의 RP를 판매하고 있다. 선착순 5만명을 대상으로 1인당 최대 200만원까지 세전 연 6%의 우대 수익률을 제공한다. 우대 수익률은 매수일로부터 3개월간 적용한다. 한도 200만원을 넘거나 매수일로부터 3개월이 지난 고객에게는 연 2.7%의 수익률을 제공한다.

최근 한 증권사 RP에 가입한 박모씨는 “투자 기간이 짧기 때문에 이자가 적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은행에 넣어두느니 잠깐 여윳돈 맡겨둔다 생각하고 가입했다”며 “예금자 보호 대상은 아니지만 우량 채권을 담보로 해 안전성도 높다”고 말했다.

황인호 기자 inhovator@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