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묘하게 법률 이용하는 법조
출신 정치인들… 보복 아닌
타협·관용의 정치 보고 싶다
출신 정치인들… 보복 아닌
타협·관용의 정치 보고 싶다
이국종 국군대전병원장이 최근 군의관 대상 강연에서 “조선반도는 입만 터는 문과 X들이 해 먹는 나라”라며 한국 의료 현실을 비판했다고 한다. 한평생을 외상외과 분야에 바친 이 병원장이 열악한 필수의료 체계가 바뀌지 않는 상황에 자괴감을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정부 정책 방향에 대한 평가는 다를 수 있지만 우리나라에서 전통적으로 국가 중대사를 문과 출신이 결정해 왔다는 건 부인하기 어렵다. 언제부터인가 한국은 문과 중에서도 법률가들이 지배하는 나라가 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법조인 출신 문재인·윤석열 전 대통령이 잇따라 대통령을 지냈고, 차기 대선 유력 후보자 면면도 법조인 출신이 많다.
지난 22대 총선에서 법조인 출신은 61명(20.3%)이 당선돼 역대 최다를 기록했다. 21대 때보다 15명 늘었다. 국회의원 5명 중 1명이 판사·검사·변호사 출신으로 채워졌다. 지난해 1월 국회입법조사처 보고서에 따르면 21대 의원 직업배경 중 정당인(보좌진 등)이 64명(21.3%)이었고, 법조계가 46명(15.3%)으로 사실상 단일 전문직군 중 가장 많았다. 한국 총인구 5100만명 대비 법조인은 약 4만명으로 전체의 0.08% 정도에 불과하다. 정치마저 ‘법조 카르텔’이 장악했다는 지적이 제기되는 이유다.
법조인들이 정치에 뛰어들고 다수 당선되는 이유로 입법 전문성, 엘리트 출신에 대한 국민 기대감 등이 꼽힌다. 현실적으로 낙선해도 변호사를 하면 되니 경력 단절 걱정이 없다. 오히려 정치 경력이 변호사 영업에 도움 되는 측면도 있다고 한다.
법률가 출신 정치인들이 법 정신에 기초해 정의롭고 공정하게 국민 자유와 권리 보호에 힘쓴다면 문제가 없을 것이다. 윤 전 대통령은 2020년 8월 검찰총장 시절 신임 검사 임관식에서 ‘법의 지배’를 강조했다. ‘법의 지배’는 권력자도 법의 통제를 받는다는 원칙이다. 하지만 윤 전 대통령은 12·3 비상계엄을 통해 권력자들이 법을 통제 수단으로 삼는 ‘법에 의한 지배’ 단계로 나아갔다.
작금의 한국은 ‘법에 의한 지배’를 넘어 ‘법률가들의 지배’ 상황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다. 정치는 갈수록 양극화하고, 법조계 출신 정치인들이 정치적 사안을 검찰과 사법부에 떠넘기는 일이 반복되고 있다. 국회입법조사처는 보고서에서 “법조계 출신 의원이 국회 전문성 강화 역할을 하기보다 양대 정당의 이념 갈등을 심화시킨다는 비판도 제기된다”며 “특히 더불어민주당은 주로 민변, 국민의힘은 검찰에서 법조인을 충원해 그런 양상은 더욱 심화됐다”고 했다.
기자 일을 십수년 하다 보면 반사적으로 ‘기사가 되나 안 되나. 독자들은 어떻게 받아들일까’를 계산한다. 직업적 관성이 쉽게 바뀌긴 어렵다. 법조의 영역은 기본적으로 ‘과거의 사실’을 따지고, 분쟁의 영역에서 상대를 공격·방어하는 일을 다룬다. 요즘 국회에선 여야 모두 고발전·소송전에 몰두하고 검찰에는 ‘똑바로 수사하라’ ‘과잉 수사다’라며 핏대를 세운다. 법원 판결에는 ‘공명정대한 판결’ ‘봐주기 판결’이라며 아전인수식 해석을 늘어놓기 바쁘다. 교묘하게 법률 용어를 동원하는 것을 보다 보면 자신들이 법률 전문가라고 국민을 바보로 아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다. 많은 법조 출신 정치인들이 분쟁 상황에서 법적 대응부터 생각하고, 그것이 현실 정치에서 표출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헌법재판소는 윤 전 대통령 파면 결정문에서 국회와 정부 간 관계에 대해 ‘관용과 자제’ ‘대화와 타협’을 강조했다. 다음 정부와 국회에선 법률가 출신이 주도하는 분쟁의 정치, 법을 이용한 보복의 정치가 아닌 타협과 관용의 정치를 보고 싶다. 대선 후보들은 “집권하면 실생활과 동떨어진 법조 뉴스로 국민을 피곤하게 하는 일은 없도록 하겠다”고 약속했으면 한다. 법 기술을 부릴 시간에 글로벌 AI 경쟁 시대 한국이 나아갈 방향만 고민해도 성공한 대통령과 국회로 남을 것이다.
나성원 사회부 법조팀장 naa@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