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미래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자신의 힘과 잠재력을 믿었다. 마치 ‘어디 올 테면 오라지. 그게 뭐든 우리의 이익으로 돌려놓겠어’라고 말하는 듯한 눈빛으로 미래를 바라봤다. 파멸을 향해 행진하는 사악한 광신도들, 당황하며 달아나는 사람들, 열정을 잃고 희생된 순교자들로 분열된 절망의 세계에서 그는 자신의 통제로 끔찍한 전개를 막을 수 있다고 믿었다. 그는 독재자의 기질과 에너지, 기량을 모두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 편이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 정보부 소속 워싱턴DC 로비스트였고 전후에는 자유주의 사상가로 활동한 이사야 벌린은 1955년 시사지 ‘애틀랜틱’에 실은 글에서 10년 전 사망한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을 이렇게 설명했다. 대공황기인 1933년 취임해 2차대전 승전을 앞둔 1945년 4월 사망할 때까지 4선에 걸쳐 12년 이어진 루스벨트의 집권기는 미국이 20세기 최대 위기를 돌파해낸 시기였다. 벌린은 루스벨트의 저돌적 리더십을 지지했고 민주주의자라는 사실에 안도했지만, 그의 이면에서 독재자의 면모도 발견했다.
루스벨트는 저돌성 탓에 스스로를 정치적 위기에 몰아넣기도 했다. ‘험프리의 집행인’ 사건이 그랬다. 루스벨트는 취임 첫해 뉴딜정책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연방거래위원회(FTC) 위원장 윌리엄 험프리에게 두 차례나 사퇴를 압박했고, 결국 해임을 명령했다. 하지만 험프리는 FTC 청사로 출근을 계속했다. FTC법상 대통령이 위원장을 해임할 수 있는 사유는 직무 소홀·태만, 직무상 부정행위로 제한된 만큼 루스벨트의 명령은 부당하다는 것이 험프리의 주장이었다. 이 사건은 연방대법원으로 넘어갔는데 험프리는 재판이 진행되던 1934년 사망했다. 이로 인해 험프리의 ‘유언 집행인’은 망자를 대리해 재판을 이어갔고 1935년 대법원에서 승소를 확정했다.
루스벨트가 패소하자 뉴딜정책 반대론자들은 즉각 들고 일어났다. 뉴딜정책의 산물로 1934년 제정된 증권거래법은 기업과 주식 딜러에 대한 규제와 의무를 강화해 월가 안팎에서 거센 반발에 직면한 상태였다. 뉴딜정책에서 시행된 농업조정법에 따라 가축 수만 마리의 도축·폐사 피해를 본 남부 농가도 루스벨트를 규탄하고 나섰다. 이후 뉴딜정책은 실업률을 끌어내리고 경기를 부양하면서 루스벨트의 업적으로 재평가됐다. 하지만 험프리의 사후 승소 판결은 90년이 지난 지금까지 ‘험프리의 집행인’ 사건으로 불리며 연방정부 기관장의 임기를 정치적 이해로부터 보호하는 근거로 계승되고 있다.
이 사건은 21세기로 넘어온 지금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 의해 다시 조명을 받고 있다. 트럼프는 통화정책 기조에서 연달아 엇박자를 내고 자신의 관세 정책을 정면으로 비판한 제롬 파월 연방준비제도(연준) 의장을 내년 5월까지 보장된 임기 전에 해임하겠다고 공언하고 나섰다. 지난 17일 백악관에서 “내가 원하면 그는 빠르게 물러날 것”이라며 강한 자신감도 내비쳤다.
하지만 트럼프의 우군인 스콧 베선트 재무장관마저 파월 해임에 대해서는 “실익이 적다”며 난색을 짓고 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법학자들은 험프리의 집행인 판결을 확고한 원칙으로 보고 있다”며 “이 판결이 90년 만에 뒤집혀도 연준은 의장의 임기를 보장할 방법을 찾아 나설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중앙은행은 근본적으로 다른 기관이 되기 때문”이라고 짚었다. 독재자의 기질과 에너지, 기량을 모두 갖춘 트럼프는 아쉽게도 민주주의의 편으로 보기 어렵다. 세계에서 가장 힘이 센 그의 권한을 저지해야 할 미국의 사법 체계가 여전히 민주주의를 수호할 힘을 가졌길, 당분간은 그것에 기대를 거는 수밖에 없다.
김철오 국제부 차장 kcopd@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