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드라마 ‘솔약국집 아들들’(2009)에 출연하며 얼굴을 알린 배우 김예랑(44·성복순복음교회)씨는 이른바 ‘떡볶이 사건’을 잊을 수 없다. 그의 둘째 딸 려원이는 태어난 지 33개월 되던 2018년 뇌전증을 진단받는다. 병원에 입원해 힘든 검사와 치료를 병행하는 려원이를 보며 김씨는 하나님을 원망하기보다는 기도에 매달렸다. 그러던 어느 날 ‘케톤 식이요법’이라는 식단 치료에 돌입하기 직전, 려원이가 가장 좋아하는 떡볶이를 먹이고 싶었다.
“려원이를 데리고 병원 예배실에서 ‘병을 고쳐달라는 것도 아니고, 떡볶이 한 번만 먹일 수 있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하는데 순간 려원이가 경기를 하며 쓰러지더라고요. 머릿속에서 뭔가 탁 끊어지는 느낌이 들더니, 태어나 처음으로 십자가를 노려봤죠.”
최근 경기도 용인의 한 카페에서 만난 김씨는 당시를 회상하며 잠시 눈시울이 붉어졌다.
욕까지 퍼부으며 려원이를 데리고 예배실을 나섰지만, 한 시간도 채 되지 않아 다시 돌아왔다. 붙잡고 따질 곳도 의지할 곳도 하나님뿐이었다. 그렇게 기도하던 그에게 하나님은 “너는 왜 네 딸을 위해서만 기도하니”라고 물으셨다. 그제야 려원이처럼 아픈 같은 병동의 아이들과 부모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들을 위해 진심으로 기도해주며 다가갔다. 려원이도 링거를 꽂은 채 함께 병실을 돌아다니며 기도에 동참했다. 려원이의 뇌수술을 앞두고 려원이를 위한 기도 모임도 생겼다. 이는 공동체 탄생으로 이어진다. 소아 뇌전증 아이를 키우는 부모와 중보기도자들이 모인 ‘화이팅게일’이 만들어졌다.
기도가 하늘에 닿았을까. 려원이는 입원한 지 80일 만에 퇴원했다. 김씨는 기뻤지만, 머릿속 한쪽에 ‘왜 우리 애만 고쳐주셨지’라는 질문이 맴돌며 마음이 무거웠다. 그 질문의 답은 15개월 후 려원이의 병이 재발하며 이내 알게 됐다. 병원에서 만나 언니 동생 사이가 된 한 아이의 엄마가 있었다. 불교 신자인 그 동생은 뇌수술을 앞둔 려원이를 위해 기도해주겠다며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려원이 보다 그녀의 아이가 더 아픈 걸 알기에 김씨는 울음을 쏟아내며 “그동안 기도를 잘 못 알려줬다”며 사과했다. 김씨는 “만약 수술이 잘 안 되더라도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며, 우리 아이를 고쳐 달라고 기도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기도는 예수님을 믿고 천국 가게 해달라는 기도”라고 일러줬다.
김씨는 “그때 그 동생이 처음으로 알았다며 하나님을 믿어보겠다고 하더라”며 “려원이의 경기가 멎었던 그때는 주님을 못 믿겠다던 그 동생이 오히려 려원이가 재발해서 다시 입원하고 뇌수술을 앞두게 되자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이후 그 동생은 손목에 찬 염주도 빼고, ‘하나님의 은혜’라는 뜻을 가진 하은이로 이름도 바꿨다.
김씨는 말한다. 아이가 아픈 건 아이나 부모가 죄를 지어서가 아니며, 아이가 병에서 회복하는 것만이 축복의 증거는 아니라고. 중요한 건 투병 과정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고 그 뜻을 이루는 것임을 깨달았다.
김씨는 2022년 남편 김진무 감독이 연출한 영화 ‘마인드 유니버스’로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 초청받았을 때의 일화를 들려줬다. 영화에 출연한 김씨도 레드카펫을 밟으며 오랜만에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날이었다.
“행사가 끝나고 집에 와서 씻는데 문득 ‘우물가 여인처럼’이란 찬양이 절로 나오더라고요. 그 가사 속 우물가의 여인처럼 헛된 것을 구하며 영적인 목마름을 느끼는 삶이 아닌, 복음을 살아내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저 세상 속에서 사람들과 하나님을 연결해주는 다리가 됐으면 합니다.”
화이팅게일은 기도 모임뿐 아니라 소아 뇌전증 및 중증질환 아동과 그 가정을 위한 인식개선 캠페인도 펼치고 있다. 온라인 찬양공연도 개최한다. 다음 달 5일 어린이날에는 서울 강남구 라움아트센터에서 뇌전증 환우 아이들을 위한 콘서트와 바자회 ‘햇빛투게더’를 진행한다. 가수 선예 송지은, MC 김원희 등 동료 연예인들이 재능기부로 참여한다. 수익금은 환아 가정의 심리 및 정서 지원, 의료비 후원으로 사용한다.
2023년 려원이는 경련이 재발해 뇌전증 투병을 계속하고 있다. 그럼에도 김씨는 “고난이 축복이라는 말을 더 믿게 됐다”고 전했다. 화이팅게일을 통해 만나는 아이들과 부모들의 삶을 통해 그는 “광야 속에 흐르는 하나님의 은혜라는 오아시스를, 예수님의 사랑을 매일 마주하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배우이다 보니 저도 어떻게 하면 더 높은 곳에 오를까 하는 마음도 들어요. 그런 면에서 화이팅게일 아이들은 마치 종이가 날아가지 않도록 얹는 서진(書鎭)처럼 제 마음을 붙잡아주는 마음의 주춧돌 같아요. 화이팅게일의 중보자로 섬기는 동안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스스로 거룩하고 선하다고 착각하지 않으려고 늘 조심하고 경계합니다. 화이팅게일을 특정 개인이나 기업에 속한 단체가 아니라, 누구나 예수님의 사랑을 발견할 수 있는 곳, 아프고 지쳐 목마르고 길을 잃어버린 사람들과 그 세상 속으로 예수 사랑이 흘러가게 하는 곳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용인=임보혁 기자 bosse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