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이 지나 가을에 이르는 때 하나님께서 “인천에 가서 교회를 세우라”고 하셨다. 삼각산에서 하나님께 7개의 교회를 세우겠다고 서원했던 것을 기억하며 인천으로 향했다.
신촌 로터리에서 인천행 버스를 타고 가 그곳이 어느 동네인지조차 모른 채 무작정 내렸다. 동네를 둘러보던 중 만난 복덕방 주인이 “좋은 건물 2층 건물이 비어 있다”고 안내해 따라갔다. 올라가 보니 약 132㎡(40평) 정도 되는 공간이었다.
건물 계약할 돈을 어디서 어떻게 구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다시 버스를 타고 신촌으로 돌아와 집을 향해 걷고 있는데 누군가 “집사님”하며 나를 불렀다. 돌아보니 고량주 회사 사장의 부인이었다. 잠시 동교동교회에 있을 때 인연을 맺었다가 삼각산에서 지낸 3년 동안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
나를 보고 승용차에서 내린 부인과 인사를 나누며 “하나님께서 인천에 교회를 세우라 하셔서 다녀오는 길”이라 말했다. 그러자 그는 곧바로 나를 차에 태워 인천으로 향해 내가 계약하려던 건물까지 함께 가 전세 계약서를 쓰고 열쇠를 건넸다. 하나님의 일에는 ‘어떻게 이런 일이 있나’ 싶을 만큼 믿기 어려운, 현실적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일이 일어나곤 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 인천에 교회를 세워야 했기에, 서울 서대문구에서 학교를 다니는 아이들이 지낼 곳이 따로 필요했다. 서대문 천연동 산기슭 판자촌에 단칸방을 얻었다. 아이들은 집 근처 집사님들이 십시일반 밥과 반찬을 챙겨주며 돌봐줬다. 하지만 아이들끼리만 오래 둘 수 없어 ‘1년 8개월만 인천에 머물겠다’고 서원했다.
교회를 개척한다는 소식에 성도들이 마음을 모아 교회 공간을 채워줬다. 교회 이름은 복음교회로 지었다. 교인도 늘기 시작해 어느덧 30명이 됐다. 당시 나는 목사가 아니었으나, 그 시절엔 목사 없는 교회가 많았다.
섬기는 동안 하나님의 일하심을 깊이 체험했다. 교회 맞은편 중국집 삼형제가 처음으로 만든 짜장면이라며 내게 가져온 날, 평소 절반도 팔지 못하던 음식이 모두 팔렸다. 신기했던지 이후로 짜장면을 자주 가져다주며 수익의 일부도 예물로 드렸다. 1년 뒤 그들은 부평에 집을 사고 가게도 확장 이전했다.
나는 신유의 은사나 기도의 능력을 사람들 앞에 자랑하지 않았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는 그저 엎드려 기도하는 것 외에 달리 할 일이 없음을 깨달아서다.
하지만 소문은 알아서 퍼졌다. 1년이 지나자 교단 소속도 없는 교회라는 이유로 이단이라는 말이 따라붙었다. 비난이 이어지며 실망도 깊어져만 갔다.
결국 이단 논란 속에 복음교회를 내려놓았다. 하나님 앞에 1년 8개월만 섬기겠다고 한 약속을 따른 것이기도 했다. 인천에서 돌아온 뒤 화곡동 2층 상가에서 두 번째 교회를 준비하던 중 충남 아산 온양교회 금요 철야 예배 강사로 처음 초청받았다.
강대상에 서서 교인들을 바라보니 거의 빈자리가 없었다. 맨 앞줄엔 장로들이 앉아 있었다. 그런데 앞줄 세 사람의 왼쪽 가슴에서 뿌옇게 연기가 피어오르는 환영을 봤다. “뿌연 연기가 피어오르는데 그게 뭐죠?” 대놓고 묻자 사람들이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들은 안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냈다.
정리=박효진 기자 imher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