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한국교회는 우연하게 부활절과 장애인의 날을 같이 기념하게 됐다. 부활과 장애인이 같이 언급되는 성경구절은 누가복음 14장 12~14절에 등장한다. 벗, 형제, 친척, 부한 이웃 대신 가난한 자, 몸이 불편한 자, 장애인들을 대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이다. 전자들은 대접에 보답할 수 있지만 후자들은 그럴 수 없으므로 의인들이 부활할 때 하나님이 대신 보답해 주신다는 것이다.
의사로 오신 예수님은 자신들의 잘못 없이 불이익과 고통을 받는 병든 자, 가난하고 소외된 자, 그리고 장애인에게 특별한 관심을 보이셨다. 특히 장애인은 일생 내내 불편과 고통에 시달릴 수밖에 없고, 노동이 쉽지 않아 도움을 받아도 잘 보답할 수 없다. 그러므로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과 부활에 대한 확실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그들을 돌볼 것이다.
한국교회는 부활은 믿지만 예수님이 사랑하시고 사랑하라고 명령하신 장애인에 대한 관심은 약하다. 부활절은 잘 지키지만 장애인의 날을 기억하는 교회는 많지 않다.
비장애인보다 장애인이 하늘나라를 더 사모할 텐데 전체 인구의 20%가 기독교인인 반면 장애인 가운데 그리스도인은 그 절반도 안 되고, 장애인 전도단체들은 재정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예수님의 십자가로 소망을 다 잃고 주님을 배신까지 했던 제자들이 회개하고 복음을 전하며 오늘의 교회를 있게 한 것은 부활이었다. 그런 부활소망은 오직 예수님만이 주실 수 있는 은혜다. 절망 상태에 있는 장애인들에게 재활의 희망을 줄 책임은 장애인을 돌보라는 예수님의 명령을 순종해야 할 비장애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있다.
그러므로 부활신앙을 가진 한국교회는 장애인 전도, 복지, 인식 개선에 앞장서야 한다. 그들에게 전도하고 그들을 위로하며 그들의 직업재활을 돕는 기관이 다양하다. 500여명의 장애인을 고용하는 ‘굿윌’ 같은 곳에 쓸 만하지만 쓰지 않는 물건을 기증하고, ‘히즈 빈즈’같이 장애인이 커피를 만드는 카페를 찾을 정도의 수고라도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이라면 적어도 장애인 시설을 혐오하는 무리의 부끄러운 난동에는 참여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