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만사] 본인이 쓴 위인전

입력 2025-04-18 00:38

지난달에 이사를 했다. 방을 정리하다가 오래된 수첩을 여러 개 발견했다. 그날 내가 뭘 했는지 적혀 있었다. 2005년 8월 3일에 학군장교(ROTC) 하계 훈련에 입소했다. 전날 머리를 바짝 잘랐던 기억이 난다. 2008년 9월 1일부터 1주일간 새벽기도를 했다. 본격적으로 취업 준비를 하던 때다. 2010년 11월 29일엔 1주일 전 포탄이 떨어진 인천 옹진군 연평도에 갔다. 주민은 떠나고 군인과 기자만 남은 섬에서 취재거리를 찾아 헤맸다. 기록하지 않았다면 기억에서 사라졌을 장면들이 수첩에 남아 있었다. 몸이 고되거나 마음이 불편했던 일들도 지나고 나니 희미한 미소를 짓게 하는 추억으로 남았다.

삶을 기록한다는 건 내가 걸어온 길을 되돌아본다는 의미다. 서울 마포구 일성여중고에 다니는 할머니 53명이 지난해 12월 자서전을 냈다. 일성여중고는 제때 학업을 마치지 못한 만학도들이 중·고교 과정을 공부하는 학력 인정 교육기관이다. 서울교육청의 만학도 대상 자서전 집필 사업에 일성여중고가 참여하면서 할머니들은 자신의 삶을 되돌아봤다. 한 할머니는 일흔 셋 인생을 회상하며 “힘든 일만 많았다고 생각했는데, 돌이켜보니 좋은 일도 많았더라”고 고백했다.

불편한 과거를 마주해야 할 때도 있다. 일성여중고 할머니 중엔 “옛날 생각을 하면 눈물만 난다”며 자서전 쓰기를 중단한 이도 있다고 한다. 이야깃거리를 찾기 위해 과거의 기억을 이끌어내려 안간힘을 써야 할 때도 있다. 나를 더 잘 알아가는 과정이다. 몰랐던 나를 발견하기도 한다. 담담히 적은 글엔 그들의 경험과 삶이 녹아 있다. 사람 사는 거 다 똑같다고들 하지만 누구나 영화 같은 이야기를 마음속에 담아두고 살고 있다. 열심히 자기 삶을 일구려는 인생은 하루를 살더라도 이야깃거리가 생겨나기 마련이다. 난 그렇게 믿는다.

늙으면 말이 많아진다고들 한다. 그러나 누구도 곁에서 이야기를 들어주려 하질 않는다. 대화할 상대가 없어서 자서전을 쓰기로 했다고 한 노인은 말했다. 책에 그동안 하지 않았던 이야기를 많이 담았다고 했다. 이야기할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고 앞으로는 더 없을 거란 걸 알기 때문이다. 노인은 가상의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해 자서전을 썼다. 나만 보기 위해 쓰는 일기와 기록하는 목적이 다르다. 그래서 노인은 “부끄러운 과거는 숨기게 되더라. 어쩌면 유서가 될지도 모르기 때문에”라고 말했다.

지난 15일 이재명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자서전을 출간했다. 전날인 14일엔 김문수 전 고용노동부 장관이 책을 냈다. 김동연 경기도지사, 한동훈 전 국민의힘 대표, 홍준표 전 대구시장, 이준석 개혁신당 의원 등이 줄줄이 자신의 이야기를 담은 책을 썼다. 정치인이 자서전을 썼다는 기사를 보니 선거 시즌이 다가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들도 책을 쓰며 자신의 삶을 되돌아봤을까. 불편한 과거를 마주했을 땐 어떤 마음이었을까. 몰랐던 나를 발견한 순간은 있었을까. 부끄러운 일들마저 영웅이 되는 과정으로 해석해 버린 건 아닐까. 한 인간의 인생은 완벽한 선택으로만 이뤄지지 않는다. 그래서 후회 없는 삶이란 없다. 이청준은 책 ‘자서전들 쓰십시다’에서 “회의가 없는 자서전이야말로 영락없이 한 거인의 동상에 불과하다”고 적었다. 그러나 우리는 종종 정치인의 자서전에서 확신에 찬 인생 스토리를 발견한다. 그들에게 자서전은 자기를 과시하는 수단일 뿐이다. 이를 위해 과거를 재구성하고 더러는 왜곡한 뒤 의심할 여지 없는 진실이라고 주장한다. 자서전이 아니라 본인 스스로 위인전을 쓰려고 해서 벌어지는 일이다.

이용상 산업2부 차장 sotong203@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