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사 귀찮은 노인 우울증… ‘동년배 상담사’가 보듬는다

입력 2025-04-18 02:07
요즘, 당신의 마음은 어떠신가요? ‘요.맘.때’는 우리 사회의 다양한 이슈를 ‘마음 돌봄’의 시각으로 조명하는 코너입니다. 이슈마다 숨어 있는 정신건강의학적 정보를 전하고 때로는 독자들에게 공감과 힐링의 시간도 제공하고자 합니다.


올해 78세인 김경숙씨는 5년차 '동년배 상담사'다. 짝꿍 상담사와 함께 어르신 18명의 정신 건강을 돌보는 김경숙씨의 가방에는 항상 손수건이 들어 있다. 가슴 속 응어리를 털어내다 눈물을 보이는 어르신들께 건네주기 위해서다. 동년배 상담사 프로그램이 첫발을 뗄 때부터 참여한 김성수(71)씨에게는 비장의 무기 '파스'가 있다. 첫 만남에서 냉담한 태도를 보였던 어르신도 파스를 붙여주는 손길에는 배어 나오는 미소를 감추지 못한다.

충남 논산시보건소 어르신 행복상담센터는 2018년부터 동년배 상담사를 모집, 지역 노인들에게 '말벗 상담'을 제공하고 있다. 현재 상담사로 활동하는 인원은 26명. 두 명이 한 조를 이뤄 담당하는 노인들의 집을 매주 방문한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할 수 있도록 같은 성별의 상담사를 배치하는 것도 특징이다. 이들은 매달 한 번은 다 같이 모여 활동하면서 느낀 어려웠던 점이나 이 프로그램의 문제점을 공유한다. 상담사 모두가 진지하게 해결책을 고민하고, 정기 교육도 성실하게 받으며 어느덧 7년째 활동을 이어왔다. 이들은 '가장 힘든 시절'로 기억되는 코로나19 유행 당시에도 마스크를 끼고 어르신들을 섬기는 일에 몰두했다.

지난 11일 충남 논산시보건소 어르신 행복상담센터에서 만난 박재용(왼쪽) 주무관과 '동년배 상담사'로 활동 중인 김성수(가운데)씨와 김경숙씨.

노인 10명 중 1명은 ‘우울 증상’


보건복지부와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지난해 10월 발표한 ‘2023 노인실태조사’에 따르면 65세 이상 노인 중 우울 증상을 보이는 비율은 10명 중 1명꼴인 11.3%였다. 특히 연령대가 높을수록 우울 증상을 호소하는 비율이 높았다.

실제로 이 같은 조사 결과는 현장에서 활동하는 상담사들에게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들은 노인들의 ‘마음 건강’에 적신호가 켜져 있다는 사실을 여실히 느낀다고 입을 모았다. 가령 독서가 취미이던 한 어르신은 눈이 나빠져 책을 읽지 못하게 되자 상실감과 비참함을 느끼면서 삶의 의지를 급격히 상실했다. 이처럼 노인은 사소한 일에도 빠르게 마음 건강이 나빠질 수 있다.

센터에서 우울증 척도 조사를 진행한 결과를 보면, 많은 어르신은 ‘홀로’ 남겨진 상황에서 깊은 우울감을 경험했다. 동년배상담사의 방문을 가뭄의 단비처럼 반갑게 여기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김경숙씨는 “외향적인 어르신들은 마을회관에라도 자주 놀러가는데, 그렇지 않고 집에만 머무는 분들이 있다. 상담사들이 찾아가면 그렇게 반가워하고 좋아하실 수가 없다”고 전했다.

김경숙씨는 “이번 한 주는 어땠냐” “약을 잘 챙겨 잡수시라” 같은 간단한 인사만으로도 가슴의 빗장이 풀어진다고 말했다. 얼굴을 맞대는 시간이 늘수록 상담사에게 드러내는 마음속 상처의 내용도 많아진다. 자식을 비롯한 누구에게도 쉽게 털어놓지 못한 말들이다. 50여분의 만남이 끝나면 조금만 더 있다 가라며 아쉬움을 감추지 못하는 어르신들도 부지기수다. 상담사들은 “다음주에 계속 얘기하자”, “또 만나자”며 이들을 달래고 서둘러 다음 집으로 향하곤 한다.

외로움은 가장 큰 독…고립감 해소

지난해 1월 기준 논산시의 노인 인구 비율은 전체의 30%로 이 중 35%는 독거노인이다. 김성수씨는 “경제적인 이유로 가족과 헤어졌거나, 사별로 인해 혼자 남은 어르신들, 자녀 독립 후 1인 가구가 된 분이 많다”며 “독거 생활 자체가 무척 외롭기 때문에 고립됐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심지어 살고 싶지 않다는 말씀을 하는 분도 있다”고 설명했다.

고립감을 최대한 줄여야 우울증도 자연스럽게 좋아진다. 김성수씨가 오랜 활동 경험에서 깨달은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대로는 위험하다’는 생각이 드는 어르신은 시간을 내어 한 번이라도 더 얼굴을 보려고 노력한다. 방문이 여의치 않을 때는 수시로 전화라도 걸어 상태를 확인한다. 소원해진 가족과 통화 연결을 주선하기도 한다. 김성수씨는 “어렵게 성사된 전화 한 통으로 주말에 온 가족이 어르신 집을 찾은 사례도 있다”며 “이런 긍정적인 전환점이 생길 때마다 엄청난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논산시가 고위험 독거노인에게 제공한 AI돌봄로봇.

논산시보건소가 고위험 어르신들의 집집마다 ‘AI 돌봄로봇’을 놓은 이유도 같은 맥락이다. 육군 병장 캐릭터 모습을 한 ‘금이’와 ‘옥이’에는 6세 지능을 가진 챗GPT가 내장돼 있다. 식사시간, 약 복용 시간 등을 알려주는가 하면 간단한 안부를 묻기도 한다. 소리를 수집해 스스로 학습하기 때문에 함께하는 시간이 늘수록 대화 내용이 풍성해지는 것이 특징이다. 귀여운 외양과 다정한 목소리에 어르신들의 만족감도 매우 높은 편이다. 상담사가 방문하면 소중한 것을 대하듯 인형을 꼭 껴안고 나오는 이도 있을 정도다.

초고령화 사회…“움직여야 삽니다”

한국의 고령 인구 비율은 꾸준히 증가해 지난해 12월에는 65세 이상 노인이 전 국민의 20%가 넘었다. 전체 인구 5분의 1이 노인인 사회에서, 이들의 마음 건강은 더이상 외면할 수 없는 문제다.

통계청이 지난 2월 발표한 ‘국민 삶의 질’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 자살률은 10만명 당 24.3명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최고 수준인데, 주목할 점은 70세 이상 자살률이 매우 높다는 것이다. 특히 남성의 경우 10만명 당 자살로 사망한 이가 70~79세는 63.9명, 80세 이상은 115.8명에 달했다.

상담사들은 마음 건강을 위해서는 ‘일어나 움직이는 것’이 중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상담을 다니다 보면 환기도 시키지 않고, 식사 시간 외에는 하루종일 누워만 있는 어르신들을 종종 만나곤 한다. 이럴 경우 근육량이 급격하게 감소해 신체 건강이 나빠지고, 결국 정신건강에도 악영향을 미치게 된다.

김경숙씨는 “몸이 아프더라도 가능한 범위에서 움직이는 것이 중요하다”며 “가까운 회관에라도 나가보시라고 반복해서 말씀드린다”고 했다. 김성수씨 역시 “움직이지 않으려 하는 어르신들에게는 지팡이를 짚고서라도 일어나라고 권한다. 기회가 된다면 멋진 지팡이를 만들어서 선물할 생각도 있을 정도로 ‘움직임’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전화 한번· 말 한마디가 치료제

가까운 이들, 특히 가족의 ‘관심’보다 강력한 우울증 해소제는 존재하지 않는다. 2014년 어르신 행복상담센터 출범부터 10년 넘도록 관련 사업을 맡아온 논산시보건소 박재용 주무관도 이 점을 힘주어 말했다. 박 주무관은 “가족의 전화 한 번,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그냥 한 번 부모님을 찾아뵙는 것이 로봇보다도, 그 무엇보다도 좋다”고 덧붙였다. 동년배상담사가 어르신께 내어준 인정과 관심이 많은 변화를 만들었듯, 가족들도 같은 방법으로 가정의 ‘행복’을 이끌어낼 수 있다는 것이다. 박 주무관은 “어르신들의 생각, 마음에 담아둔 이야기를 들어줄 때 이들의 자존감도 높아진다”며 “가까운 이들의 인정만으로도 우울증이 눈에 띄게 해소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논산=글·사진 박선영 기자 pomm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