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섬情談] 일그러진 검은 예술을 향한 항변

입력 2025-04-16 00:34

경쟁 논리 줄세우기에 빠진
오늘날 예술가들… 진솔한
소통과 희망 함께 고민하길

상황에 따라 다르겠지만 예술을 업으로 삼은 이들이 배고프지 않았던 적은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예술 지상주의자에게 가난은 일종의 구도적 상징이요, 심지어 낭만이었다. 예술을 통한 소통은 그 추구 자체가 비경제적 속성이 강하다. 잠시의 사유조차 진저리치는 현대인을 위한 미디어는 평등성 구현이란 순기능도 있지만 속도전과 효율주의의 함정에 깊이 연루돼 있다. 이런 시대에 예술을 지속하기란 여간해선 힘들다. 예술은 처음부터 경제성과는 거리가 멀다고 봐야 한다.

그렇다고 동서고금의 진리로 자리 잡은 예술가의 비경제성이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비경제성을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도 충분히 문제 삼을 수 있겠지만 무엇보다 예술가의 비경제성을 기반으로 추구되는 모든 가능성이 부정적인 것도, 안타까운 것도 아니라는 데 있다. 예술가의 가난을 심지어 찬양할 수 있는 결정적 근거가 바로 여기에 있다. 예술은 비경제적이기에 오늘의 세계를 향해 마음껏 쓴소리를 뱉을 수 있다. 적어도 타협하고 눈치 보는 효율주의의 연결고리로부터 자유롭기 때문이다. 순수예술로 대표되는 시, 문학, 미술은 쉼 없이 자유의 극점에서 노래해 왔으며 생명의 아름다움, 인간의 존엄, 풍부한 사유의 밀어들을 마음껏 쏟아내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이러한 예술은 앞으로도 사회의 아픔을 위로하고 쓴소리를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오늘 우리 사회에 나타난 예술 표현이 온통 일그러진 검은 색깔로 도배됐다. 검은 예술가의 탄생은 정서가 검정이 가진 고유의 막막함과 불온함에 빚지고 있음을 뜻한다. 이는 사회의 병리를 지적하는 수준도, 그들만의 표현 유희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오늘의 예술은 자진해서 검은색으로 무장한 것이다.

예술가가 검다는 것은 고유한 영역인 비경제성에서 본 현실에 나타난 새로운 염증을 고발하는 것이기도 하다. 오늘의 사회가 순수예술의 깊이에 관심 두지 않고, 망각할 때 예술가는 스스로 검어진다. 검은 예술의 탄생은 그만큼 예술가의 영혼이 더는 자신들만의 자유 영역에서 생명의 충만을 말할 만큼 한가하지 않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혹자들은 오늘의 순수예술이 난해하며 음울하기까지 한 검은 색채로 무장하고 자신들만의 유배지에 스스로 감금된 것처럼 보인다며 볼멘소리를 한다. 작금의 현상을 대중과의 소통을 아예 포기한 엘리트주의로 폄훼하기도 한다. 하지만 과연 그런가. 오늘의 사회에서 예술가들이 쉼 없이 검은 정서의 표현을 쏟아내는 것이 자기만의 성역을 쌓아 올리기 위함인가.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오늘의 예술은 벽을 허물기 위해 필사적이다. 경쟁에서의 도태를 실패라고 규정하는 현실에서 실패를 오히려 도전이라 말하고 물질의 결핍이 사상의 자유를 보장한다는 명제를 더는 믿을 수 없기 때문이다.

분명 오늘의 예술가들은 스스로 검은 예술가이기를 자처하고 있다. 그들은 비록 자신들이 쏟아내는 사회에 대한 독설, 여과되지 않는 거칠고 난해한 표현의 배설, 희망을 그리워할 수 없음에 대한 감수성의 발작으로 대표되는 검은 예술 행위가 자신들만의 유희에 머무를지도 모를 자폐의 위기를 감수하고서라도 검은 세계로의 천착을 주저하지 않는다. 어째서 그런가. 왜 벽을 허물고 고고한 비경제성의 성지로부터 나와 세속 도시와 뒤엉키려 하는가. 그것은 오늘의 문화를 지배하고 있는 소통의 평등성에 대한 가능성과 그에 반하는 이익 논리 창궐에 대한 적극적 저항의 표지로서 예술 활동을 새롭게 자리매김하고자 함이 아닌가.

오늘 우리가 사는 사회는 새로운 패러다임의 미디어가 몰고 온 소통의 적극성으로 인해 새로운 꿈을 꾸게 됐다. 하지만 그 꿈이 또다시 경쟁 논리로 줄 세우기를 반복하는 구태로의 편입을 욕망한다면 돌이킬 수 없는 소통의 이중 막힘에 직면할 것이 자명하다. 검은 예술은 그런 이중 막힘의 최악을 경고하고 있으며 진솔한 소통, 희망, 낭만에 대해 함께 고민해 보길 원하는 손짓을 계속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제 그 손짓에 응답하는 일만 남았다.

주원규(소설가·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