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엄 선포부터 탄핵 선고까지
불안하고 소란스러웠던 넉 달
극단으로 팽팽히 갈린 사람들
항공기 사고·산불·싱크홀
언제 어디서 재난 닥칠지 몰라
무탈하고 안온한 삶의 소중함
국민이 바라는 세상은
정치 걱정 없는 평범한 일상
후보들 특별한 노력 필요해
불안하고 소란스러웠던 넉 달
극단으로 팽팽히 갈린 사람들
항공기 사고·산불·싱크홀
언제 어디서 재난 닥칠지 몰라
무탈하고 안온한 삶의 소중함
국민이 바라는 세상은
정치 걱정 없는 평범한 일상
후보들 특별한 노력 필요해
계엄 선포부터 탄핵 선고까지 넉 달, 이후 열흘을 지나는 내내 머릿속을 맴돈 말은 ‘아주 보통의 하루’였다. 어제와 크게 다르지 않은 오늘, 무난하고 무탈하고 안온한 삶. 어떻게 보면 그저 그런 하루인데 그게 참 힘들었다. 정치적 어둠의 터널을 지나온 우리에게는.
참 많은 일이 있었다. 불안하고 소란스러웠다. 탄핵 선고가 있던 날, 비로소 봄이 온 듯 햇살이 쏟아졌다. 서울 경의선숲길을 걸었다. 벚나무들이 마침 꽃망울을 터트렸고, 겨우내 비어 있던 실개천에는 물이 졸졸 흐르고 있었다. 사람들의 표정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편하고 밝아 보였다. 상식적인 판단이 나오기까지 이렇게 오랜 시간이 걸릴 일이었나 하는 후련함과 안도감이었을까.
그날의 평온한 풍경은 넉 달 전 어느 날을 떠올렸다. 전날 밤 느닷없는 비상계엄 선포를 겪은 후였지만 사람들은 이상하리만큼 평온해 보였다. 2024년 12월 3일, 계엄 선포에 놀란 시민들은 국회로 달려왔다. 무장 군인을 실은 헬기가 국회 상공에 떴고, 살벌한 대치가 있었지만 국회는 2시간반 만에 계엄령을 취소시켰다. 그렇게 맞은 다음 날, 사람들은 아찔했던 상황에 분노하고 걱정했으나 한국 민주주의의 회복력을 확인했다는 자긍심과 안도감이 더 컸던 것 같다.
그렇게 금방 결론이 날 것 같던 일이 길어지며 넉 달이 지났다. 초기에 계엄을 비판했던 사람들은 어느새 양쪽으로 팽팽하게 갈라져 버렸다. 탄핵 절차는 마무리됐지만 진영으로 나뉜 사람들은 지진으로 갈라져 점점 벌어지는 땅의 양 끄트머리에 서 있는 듯 멀어졌다. 우리가 다시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이름으로 하나 될 수 있을지가 더 큰 문제가 되어 버렸다. 지난 금요일, 파면된 대통령은 탄핵 선고 일주일 만에 관저를 떠났다. 미소를 지으며 지지자와 포옹하고 악수하고 손을 흔들었다. 마치 임기를 다 마친 존경받는 대통령이 퇴임하는 듯 기이한 풍경이었다. 국민을 향한 진솔한 사과 한마디 없었다. 대신 “다 이기고 돌아왔다”라는 알 수 없는 말을 했다.
정치만 우리를 혼란스럽게 한 건 아니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쏘아 올린 관세전쟁은 리더십 부재의 대한민국 경제를 크게 흔들었다. 약 100년 전 경제 대공황 때와 맞먹는 충격이 올 것이라는 전문가들의 분석을 마주하며 한참 쪼그라든 주식 잔고를 바라봤다. 대규모 희생자를 낸 제주항공 사고, 영남 지방을 할퀴고 간 무서운 산불도 있었다. 갑자기 땅이 꺼져 생긴 싱크홀을 보며 발밑의 안위를 걱정했고, 엊그제 광명 신안산선 공사장 붕괴 사고를 보며 한 번 더 놀란 가슴을 쓸어내려야 했다. 오늘은 세월호 11주기다. 그토록 다짐했던 안전한 사회에 대한민국은 얼마나 가까워졌을까. 별로 달라진 게 없어 씁쓸하다. 우리는 여전히 뜻밖의 재난과 사고가 언제 어디서 닥칠지 모르는 사회에 살고 있다. 그러다 보니 정치 경제 등 거대 담론 말고 개개인에게 별일 없는 보통의 하루가 소중하게 느껴진다.
아주 보통의 하루는 서울대 소비자학과 김난도 교수가 제시한 ‘트렌드 코리아 2025’ 키워드 중의 하나다. 한 번 사는 인생 하고 싶은 거 다 하자는 ‘욜로’도,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을 추구하는 ‘소확행’도 아닌 그냥 평온한 하루다. 그저 무탈하게 지나가길 바라는 하루다. 남들에게 ‘나 이렇게 잘 살고 있어요’라고 SNS로 과시하기보다는 자신에게 집중하며 내실을 찾자는 뜻도 담겨 있다. 이 말은 서울대 심리학과 최인철 교수의 책 ‘아주 보통의 행복’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라고 한다.
결국 대통령은 파면됐고, 다음 대통령을 뽑는 절차가 시작됐다. 여러 후보들이 출사표를 던졌다. 결국은 국민 통합과 신뢰 회복이 가장 중요한 키워드가 될 것이다. 궁극적으로 우리가 바라는 세상은 거창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국민이 정치 걱정 안 하고 아주 보통의 하루를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이 아닐까.
계절의 변화를 느끼며, 좋아하는 아티스트나 스포츠를 응원하고, 가까운 사람들과 밥 먹고 사소한 이야기에 웃으면서, 적당한 노동으로 피곤해진 몸으로 푹 잠드는 하루. 시민들에게 이런 보통의 하루를 선사하기 위해서는 정치인들의 아주 특별한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올봄 정치인들은 여기에 집중했으면 좋겠다. 장미 대선을 앞둔 이번 봄이 우리 정치사에 ‘아주 특별한 봄날’로 기록되길 바란다.
한승주 논설위원 sjha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