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코너] 트럼프 앞에서 당당하려면

입력 2025-04-16 00:38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1기 재임 시절 문재인 전 대통령과 남·북·미 대화라는 거대한 외교 이슈의 공동 기획자였다. 협력해야 할 일이 많았지만, 서로 ‘코드’가 맞는 사이는 아니었다. 트럼프 참모들의 회고록을 보면 그가 문 전 대통령을 못마땅해했다는 후일담이 적지 않다. 존 볼턴 전 국가안보보좌관은 회고록에서 2019년 DMZ 북·미 정상 회동 당시 트럼프가 문 전 대통령의 동행을 원치 않았다고 썼다. 허버트 맥매스터 전 국가안보보좌관도 회고록에서 2017년 6월 첫 정상회담 당시 문 전 대통령이 사드 배치와 관련해 환경평가를 거론하자, 트럼프가 “환경영향평가는 시간 낭비”라고 소리쳤다고 전했다.

그래도 한·미 관계가 비교적 순탄하게 굴러간 것은 문 전 대통령이 당시만 해도 한국에서 높은 지지를 받는 대통령이기 때문이었다. 한 외교 소식통은 “트럼프가 문 전 대통령을 좋아하진 않았지만, 적어도 무시하진 못했다. 문 전 대통령의 지지율이 높았기 때문”이라며 “트럼프도 지지율이 높은 해외 정상은 함부로 대하지 않는다”고 했다. 트럼프는 누구에게나 강한 사람이지만, 약한 사람에겐 잔인할 정도로 더 강해지는 사람이다. 해외 정상이라도 약한 모습을 보이면 여지없이 짓밟는다. 백악관에서 공개 모욕당한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 ‘51번째주 주지사’라고 조롱당한 쥐스탱 트뤼도 전 캐나다 총리가 대표 사례다. 트럼프가 가장 좋아하는 스포츠가 피가 튀고, 살이 찢겨나가는 종합격투기라는 점은 그의 성정을 보여준다.

트럼프는 ‘스트롱맨’에게는 부드럽다. 권위주의 지도자인 북한 김정은, 중국 시진핑, 러시아 블라디미르 푸틴에게는 좀처럼 험한 말을 하지 않는다. 국민 지지가 ‘스트롱’한 지도자들에게도 트럼프는 한결 부드러워진다. 트뤼도가 물러난 뒤 취임한 마크 카니 캐나다 총리는 미국의 관세 위협에 “미국과의 오랜 관계는 끝났다”며 당당하게 맞섰다. 카니를 중심으로 캐나다가 똘똘 뭉치자 트럼프의 51번째주 조롱은 잠잠해졌다. 클라우디아 셰인바움 멕시코 대통령도 국내 지지율이 80%에 육박하는 지도자다. 미국 관세에도 보복 관세를 언급할 정도로 강단이 있다. 트럼프가 셰인바움을 조롱한 경우는 찾기가 어렵다. 트럼프는 스트롱맨을 좋아하거나, 적어도 존중한다.

한국에서 윤석열 전 대통령이 중도 퇴장하면서 새 대통령을 뽑는 선거전이 시작됐다. 누가 되든 가장 큰 숙제는 트럼프다. 새 행정부는 상호관세와 방위비 협상이라는 무거운 숙제를 안고 출발해야 한다. 트럼프는 관세를 두고 하루가 다르게 말을 바꾸고 있다. 방위비를 두고서는 한국이 ‘머니 머신’이라며 대폭 인상하겠다고 밝힌 상태다. 한국 정부의 새 대통령은 이런 트럼프를 상대해야 한다. 한국이 처한 안보 현실, 미국과의 오랜 동맹 관계를 고려하면 한국이 트럼프에게 ‘보복 관세’ 같은 카드를 꺼내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한국 대통령은 싫든 좋든 미국 대통령과 관계를 원만하게 조율하지 못하면 제대로 국정을 이끌 수 없다. 트럼프는 버겁고, 선택할 수 있는 카드는 적다.

트럼프의 발언 중에 진짜가 무엇인지 알 수는 없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가 만만해 보이는 사람 앞에서는 더욱 ‘갑’으로 변한다는 점이다. 트럼프가 깔보는 상대가 되지 않으려면 지지율이 높은 대통령이 돼야 한다. 누가 한국의 새 대통령이 되든 국민을 통합해 넓고 단단한 지지를 받아야 트럼프의 기세에 눌리지 않고 당당하게 협상할 수 있다. 가뜩이나 내전하듯 갈라진 한국 정치에서 윤 전 대통령처럼 국민을 갈라치는 반쪽짜리 대통령이 다시 등장한다면? 백악관에서 트럼프를 만나는 순간부터 위기가 시작될 수 있다.

임성수 워싱턴 특파원 joyls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