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사초롱] 이반 일리치의 회고록

입력 2025-04-16 00:32

‘이반 일리치의 죽음’은 톨스토이가 중년의 실존적 위기 속에서 길어 올린 죽음 문학의 정수다. 슈테판 츠바이크의 말대로 톨스토이는 창밖 실제 세상을 그대로 보여주는 작가였고, 인간이 어떻게 죽어가는지를 하나의 이야기로 보여준다. 우리는 이 이야기를 읽지 않고 ‘보게’ 된다. 그리고 그 속에서 거울처럼 우리 자신을 마주한다. 정확하게는 우리 죽음을 마주한다.

나이가 들어가니 환자에게서 내 모습이 보인다. 환자의 병상은 결국 내가 누울 침대고 환자의 고통은 언젠가 내가 겪어야 할 경험이다. 환자는 의사에게 또 다른 거울이다. 이반 일리치처럼 누구나 ‘자신의 죽음’은 이해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해와 무관하게 죽음이 갑자기 나타나 남은 시간을 가리키며 다그친다. 이 가차 없는 진실 앞에서 우리는 죽음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언뜻 보면 해결책 같지 않지만 죽음을 받아들이기 위해 사람들은 삶의 의미를 찾는다. 죽음의 수용과 삶의 의미 찾기는 동전의 양면처럼 같은 것의 다른 면이다.

이반 일리치는 과거를 회고하며 그의 인생이 거짓으로 증발돼 아무런 의미도 남아 있지 않으면 어떡하나 괴로워한다. 그는 간절히 자기 삶의 의미를 찾길 바란다. 하지만 톨스토이는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 직접 말하지 않는다. 삶의 의미는 대문호의 책이 아니라 우리의 개별 삶에 쓰여 있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인생은 삶의 보편성이 침범하지 못하는 오롯이 그 사람만의 것인 부분이 있다. 그리고 삶이 그 사람 것인 만큼 죽음도 그렇다. 내 것이어야 하는 게 죽음이다.

관건은 죽음이 닥친 그 시점에 자신만의 삶의 의미들을 어떻게 실처럼 자아내느냐다. 우리에게는 인생을 살아오며 누에고치처럼 압축해 놓은 의미의 실들이 있다. 그것을 찾기 위해서는 자신의 과거를 향해야 한다. 죽음은 무엇보다 회고의 시점이다. 나는 죽음을 기다리는 환자에게 “살아오면서 뭐가 가장 후회되시느냐”고 가끔 물어본다. 그 후회를 되돌릴 수 있어서가 아니라 인생에서 가장 소중했던 게 무엇인지 찾았으면 해서다. 이런 관점에서 후회는 긍정적이다. 후회는 깊은 기억의 우물 속에서 의미를 긷는 질문이고 우리가 무엇을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지에 대한 단서다.

그래서 우리 인생이 하나의 이야기로서, 또 다른 이반 일리치의 이야기로서 읽히기를 기대해야 한다. 이야기의 첫 독자는 우리 자신이겠지만 작가이면서 독자인 것이 삶이다. 그렇다면 의사는 무엇을 해줄 수 있을까. 의사의 역할은 시간을 벌어주는 것밖에 없다. 환자가 과거에서 삶의 의미를 찾고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런데 그 시간은 고통의 시간이기도 하다. 고통 속에서 헤매다 보면 의미를 놓치고 만다. 밤새 아파서 뒤척였던 암환자는 통증이 나아지기를 기대하며 새로운 아침을 맞지만 더 또렷한 통증이 기다리고 있다. 이런 최악의 고통을 덜어주는 것이 의사의 역할이다. 죽음의 순간 환자가 삶에 대한 환멸이 아니라 자신의 삶으로부터 위로받을 수 있도록, 그리고 작가로서 이야기를 쓸 수 있도록. 어쩌면 의사는 그 이야기를 같이 써 내려간다.

그동안 그렇게 대단했던 의학의 권위는 사실 임종을 기다리는 환자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의사는 죽음 앞에 무기력하게 ‘같이 서 있는 인간’일 뿐이다. 그렇지만 이때는 의사보다 한 사람의 인간이 더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의사가 더 인간적으로 보일지도 모르겠다. 의사가 더 이상 해줄 게 없을 때, 그동안 내세웠던 어떤 권위도 없이 미안함만 남아 있을 때, 죽음이라는 똑같은 지평에서 의사도 환자도 모두 이반 일리치가 될 때, 그제야 환자를 이해하게 됐다면 너무 늦은 것일까.

김대현 창원파티마병원 흉부외과 과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