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제약 산업이 ‘포스트 동물실험’ 시대를 준비 중이다. 인공지능(AI)과 오가노이드(Organoid·미니 장기)를 활용한 신약개발 기술이 제약 업계의 ‘게임 체인저’로 떠오르고 있다. 미국 식품의약국(FDA)이 최근 신약 허가 요건에서 동물실험을 단계적으로 폐지하겠다고 밝히면서 속도가 더욱 붙을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에서는 연간 500만 마리에 가까운 동물들이 실험에 사용되고, 절반가량이 극심한 고통을 수반하는 ‘E등급’ 실험에 동원되고 있다. 기술력은 확보했지만 제도와 행정이 글로벌 흐름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FDA 실험동물 폐지… 국내 AI 바이오 ‘기회’
15일 업계에 따르면 FDA는 지난 10일(현지시간) 항체 의약품을 시작으로 신약 허가 요건에서 동물실험을 단계적으로 폐지하겠다고 공식 발표했다. 기존에는 세포실험, 동물실험, 임상시험으로 이어지는 전통적인 개발 방식이 필수였지만, 이번 결정으로 동물실험을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길이 열렸다.
동물실험 대체 방법은 크게 두 가지다. 줄기세포를 활용해 인간의 특정 장기를 체외에서 모사한 ‘오가노이드’와 AI를 이용한 예측 모델링 방식이다. 마틴 마카리 FDA 국장은 “AI와 오가노이드는 기존 동물실험보다 예측력과 안전성이 높다”며 “신약 개발에 소요되는 시간과 비용을 줄이고, 결과적으로 환자의 약가 부담도 낮출 것”이라고 강조했다. 실제로 항체 의약품 개발에 들어가는 비용은 약 6억5000만~7억5000만 달러(9446억~1조900억원)에 이른다. 일반적으로 신약 동물실험에 필요한 영장류는 총 144마리로, 한 마리당 최대 5만 달러(7265만원)의 비용이 든다.
미국 정부와 유럽 집행위원회는 동물실험 없이도 신약 허가 신청이 가능하도록 법적 근거를 마련해둔 상태다. 그러나 아직까지 동물실험 대신 다른 방식의 데이터로 전임상이 허가된 사례는 없다. FDA의 이번 발표는 실제 허가 과정에서 동물실험을 대체할 수 있는 실험 데이터를 받아들이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으로 해석된다.
FDA 발표 이후 국내 AI 기반 제약업계에도 훈풍이 불었다. AI 기반 신약 개발 플랫폼을 보유한 신테카바이오는 FDA 발표 직후인 지난 11일 지난주 대비 약 16% 이상 주가가 상승했고, 온코크로스는 약 18% 급등했다.
신테카바이오는 AI 신약개발 플랫폼 ‘딥매처’(DeepMatcher)로 신약 후보물질을 도출하고 유전체를 분석한다. 지난해에는 국내 최대 규모 환자유래 오가노이드 바이오뱅킹 기업 그래디언트와 업무협력을 체결하는 등 동물대체시험법에 대한 시스템을 확보했다. 온코크로스 역시 ‘랩터AI’라는 자체 AI 신약 플랫폼을 보유하고 있다.
실험쥐 대신 ‘미니 장기’로 검증
‘미니 장기’ 오가노이드 기술도 급부상 중이다. 오가노이드는 줄기세포를 활용해 사람의 장기를 모사했기 때문에 동물실험과 비교해 인체 반응을 보다 정밀하게 반영할 수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미국 바이오기업 시그넷테라퓨틱스는 지난 1월 위암 치료제 후보물질 임상시험에 들어갔다. AI로 개발해 오가노이드로 검증한 신약 후보물질이 임상 단계에 들어선 최초 사례다. 시그넷테라퓨틱스는 AI 플랫폼으로 약물 후보군을 추린 뒤 오가노이드로 검증해 성공 가능성이 높은 후보 물질을 찾아낸 것으로 알려졌다.
영국 아스트라제네카는 혈액암 치료제 개발에 오가노이드를 활용한다. 최근 도입한 골수 오가노이드 AI 분석 플랫폼을 사용한 결과 임상 1상 성공률이 크게 높아졌다. 아스트라제네카는 2011년 임상 1상의 30%가 안전성 문제로 실패했는데, 이 플랫폼을 도입한 후 7년 동안 한 건도 실패하지 않았다.
스위스 로슈는 글로벌 제약사 중 가장 큰 오가노이드 연구소를 운영한다. ‘오가노이드의 아버지’로 불리는 한스 클레버스 네덜란드 위트레흐트대 교수를 2023년 영입한 이후 뇌, 신장, 폐, 간 등 여러 종류의 오가노이드를 개발하고 있다.
국내에선 티앤알바이오팹, 오가노이드사이언스 등 스타트업들이 오가노이드 플랫폼을 개발 중이다. 일부는 3D 바이오프린팅 기술과 결합해 전임상 시험을 대체할 수 있는 모델을 준비 중이다. 독성평가 분야 한 전문가는 “AI와 오가노이드는 윤리성과 과학성을 모두 갖춘, 동물실험을 대체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해법”이라며 “정부가 더 늦기 전에 제도 정비에 속도를 내야 한다”고 말했다.
500만 실험동물, 절반이 ‘극심 고통’
한국은 신약개발 대체 기술이 고도화되고 있음에도 제도적·행정적 대응은 여전히 제자리다. 2021년 충북대 수의학과가 건강한 비글 두 마리의 눈을 적출해 3D 프린팅 인공 안구를 이식한 뒤 안락사시킨 실험이 공개되며 사회적 공분을 샀지만, 윤리 논란이 컸음에도 정부의 후속 대응이나 규제 강화는 지지부진한 상태다.
국내 실험동물 사용은 증가 추세다. 농림축산검역본부에 따르면 2022년 실험에 사용된 동물 수는 총 499만5680마리로 3년 사이 30% 이상 증가했다. 2023년에는 458만여 마리로 소폭 감소했지만, 극심한 고통을 수반하는 ‘E등급’ 실험에 동원되는 동물의 비율은 최고치였다. 미국과 유럽이 A~C 등급 중심의 저고통 실험 방식으로 전환 중인 흐름과는 명확히 대조된다.
보건복지위원회를 통과한 ‘동물대체시험법의 개발·보급 및 이용 촉진에 관한 법률안’은 관계 부처 간 이견 조율에 실패하며 심사가 보류됐다. 정책 집행 기관의 움직임도 더디다. 식품의약품안전처가 475억원을 들여 개발한 동물대체시험법의 기술은 국제표준으로도 승인받았지만 국내에서 활용된 사례는 ‘0건’이다. 예산 편성도 미흡하다. 식약처의 올해 총예산 7489억원 중 동물대체시험법 관련 예산은 100억원(1.3%)에 불과하다. 같은 분야에 20년간 약 1조5000억원을 투자한 유럽연합(EU)이나 미국의 연간 500억원 규모 투자와 비교하면 격차가 크다.
반면 비동물성 기술을 상용화하려는 민간의 움직임은 이미 시작됐다. 종근당바이오는 최근 비동물성 보툴리눔 톡신 ‘티엠버스주’에 대해 식약처 품목 허가를 받았다. 기존에는 사람혈청알부민(HSA) 같은 동물성 부형제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제조 전 과정에서 비동물성 원료를 사용해 감염 및 알레르기 위험을 줄였다. 비건 소비자와 면역 민감군 모두를 고려한 접근이다.
이다연 기자 ida@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