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현실(VR)의 꿈은 거짓처럼 사라지는가.
게임 산업계에서 메타버스, 인공지능(AI)과 함께 새 먹거리로 주목받던 VR시장이 몇 년째 답보 상태다. SF영화처럼 헤드셋 하나만 쓰면 새로운 세상이 열릴 듯 대대적으로 홍보했지만 미진한 하드웨어 성능, 비싼 가격, 낮은 접근성 등 여러 문제로 이용자의 관심이 점차 줄어들고 있다.
VR은 고글과 장갑 형태의 기기를 착용하면 실제와 유사한 환경이나 상황을 경험할 수 있는 기술이다. 1960년대 미국 할리우드 영화 감독이 소리, 진동, 냄새를 체험할 수 있는 시뮬레이션 기기를 만들면서 VR이 시작됐다. 군사 훈련, 우주비행사 훈련 등 특수 목적에 활용되다가 2010년대 들어서 온라인 게임과 결합하며 주목을 받았다. 현재도 게임과 의료 등 여러 분야에서 사용되고 있다.
VR과 접점이 많은 게임 업계에서는 관련 기기를 활용한 작품을 꾸준히 내놓고 있다. 컴투스, 데브시스터즈, 스마일게이트는 각각 1인칭 슈팅 게임(FPS), 리듬, 시뮬레이션 등의 VR 게임을 차례로 선보인 바 있다. 이 외에도 공포, 스포츠, 레이싱 등 다양한 VR 게임이 있다.
그러나 VR 게임은 좀처럼 활성화되지 못하고 있다. 게임 속 세계를 체험하기 위해선 별도의 혼합 현실(MR) 기기를 착용해야 하는데, 이렇게 공을 들이면서까지 즐길만한 콘텐츠가 부족하다는 지적이 많다. VR 게임을 접해본 게이머들은 “굳이 고글까지 쓰고 게임을 할 이유가 없다” “처음엔 신기하지만 오래 착용하면 불편하다. 차라리 조작이 쉬운 PC나 콘솔이 더 편하다”는 평가를 리뷰에 올렸다.
장비 가격도 상당하다. 메타에서 내놓은 MR 헤드셋 ‘퀘스트3’와 ‘퀘스트3S’는 각각 72만9000원, 43만9000원에 판매하고 있다. 애플의 MR 헤드셋 ‘비전 프로’의 가격은 용량에 따라 499만원부터 많게는 560만원에 육박한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이 발간한 ‘게임이용자 실태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전체 게이머 중 VR 게임을 이용한 비율은 7.3%로 2023년(7.4%)보다 소폭 감소했다. 2018년(5.7%), 2019년(5.8%), 2020년(5.4%), 2021년(5.8%), 2022년(4.6%) 꾸준히 이용 비율이 증가했다가 정체 상태다.
VR 기기도 덜 팔린다. 시장조사업체 카운터포인트리서치에 따르면 2024년 전 세계 VR 헤드셋 출하량은 지난해보다 12% 줄었다. 3년 연속 감소세다. 직전 분기와 비교하면 16% 하락했다.
김정태 동양대 교수는 “VR 기기 착용에 따른 인지 부조화, 무게, 가상현실의 콘텐츠 환경 등 여러 기술적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있다”면서 “최근 여러 기업에서 AR 글라스, 홀로렌즈 등을 출시해 한때는 유망 신기술로 떠올랐으나 여전히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많다”고 지적했다.
게임사 입장에서 VR은 매력적이다. 눈과 귀, 손만으로 즐기는 게임의 한계를 넘어 온 몸으로 게임 속에 뛰어드는 말 그대로 가상현실을 제공하기 때문. VR 시장의 부흥을 십수년째 손꼽아 기다리는 이유다. 올해 글로벌 빅테크 기업이 앞다퉈 블록체인 사업을 강화하고 저렴한 MR 기기를 개발하겠다고 발표한 상황에서 VR 시장도 볕 들길 기대하는 게임 업계에 많다.
VR 게임이 대중성을 확보하려면 무엇보다 보편적인 기기 확산이 우선되어야 한다. 이승훈 안양대 교수는 “3~5년 전부터 VR 시장이 죽었다는 평가가 있지만 매출이 확 뛰어오르지 못했을 뿐”이라면서 “일반인들이 VR 디바이스를 보유하지 않은 게 가장 큰 문제다. 정부, 지자체에서 기기 보급을 지원해준다면 관련 사업 성장은 당연히 따라올 것”이라고 말했다.
VR 산업의 확장성을 꾀하려면 건축, 제조업 등 여타 산업과의 접점도 넓혀야 한다. 김 교수는 “VR의 숱한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선 ‘디지털 트윈’으로 가야 한다”면서 “스마트팩토리, 가상 건축 등 현실에서 구현하기 힘든 공간을 가상 기술의 도움을 받아 시뮬레이션화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김지윤 기자 merr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