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강영애 (10) 죽기로 결심하고 올라간 산이 새로운 삶의 터전으로

입력 2025-04-15 03:04
강영애 목사가 세 남매와 함께 3년간 머물렀던 삼각산 동굴. 삶의 절박함 속에서도 믿음을 지키며 버텨낸 피난처였다. 강 목사 제공

거리에서 생을 마감하고 싶지 않아 조용히 삶을 정리하고자 오른 산에서 뜻밖에 사람들을 만났다. 서울 성동구 금호동에서 목회 중인 담임목사와 그를 따르는 청년들이었다. 그들은 산에 움막을 세우고 그곳을 기도처로 삼고 있었다.

자정이 넘은 시간, 한 청년이 납작한 스테인리스 그릇에 담긴 수제비를 가져다주었다. 아이들에게 나눠주고 함께 먹으려 했지만 목이 막혀 한 숟갈도 넘기지 못했다. ‘하나님은 나와 아이들을 죽게 내버려 두지 않으셨구나. 어린 핏덩이들과 함께 살아갈 길을 미리 준비해 주셨구나.’

다음 날 움막 아래 바위 동굴을 발견했다. 아이들과 그곳에서 지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불 없이 낙엽만 깐 돌바닥에 아이들을 눕히곤 ‘얼어 죽지 않을까’ 걱정하며 밤마다 기도했다.

삼각산은 내 과거가 어땠는지 묻지 않았다. 당장 오늘 먹고살 일이 더 급했다. 어떤 날은 바위 사이 흐르는 물로 버텼다. 움막에 가면 수제비를 먹을 수 있었지만 매일 갈 수 없었다. 아이들은 어떻게든 얻어 먹였지만 나는 수치스럽고 미안한 마음에 자주 끼니를 걸렀다.

그래도 산에서 생활하면서 얻은 큰 기쁨은 언제든지 마음껏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낮에는 성경을 읽었고 밤에는 바위 위에서 기도했다.

세 아이는 산에서 두 시간을 걸어 국민학교에 다녀야 했기에 새벽부터 등굣길에 올랐다. 제대로 먹지도 못했고, 학교에선 친구들이 쓰다 버린 공책과 닳은 지우개로 공부했다.

삼각산에 들어왔을 땐 한겨울이었다. 추위에 익숙해질 무렵 봄이 찾아왔다. 눈 녹은 자리마다 꽃이 피기 시작했다. 그 풍경이 아름답기보다 ‘먹을 게 생겼다’는 원초적인 생각이 앞섰다. 살아남기 위해 먹을 수 있는 풀과 열매를 알아봐야 했다. 도토리나 밤 같은 열매가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먼저 본 사람이 가져가는 게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게 버티며 두 번째 겨울을 맞았다.

어느 날 삼각산에 온 어떤 사람이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 첫째 아이에게 물었다.

“왜 이런 곳에서 지내니? 친척은 없어?”

“아니요. 광주에 정미소 하는 할아버지가 계세요.”

“겨울방학인데 할아버지 댁에 가봐야지.”

그는 아이들에게 차비를 챙겨줬다. 뜻밖에 아이들을 광주로 보낼 여비가 생겼다. 잠깐이라도 따뜻하게 지내길 바라며 첫째와 둘째를 친정으로 보내기로 했다. 누군가 알아볼까 걱정돼 한밤중에 두 아이를 데리고 걸어서 서울역으로 향했다.

광주역에서 외할아버지 집까지 가는 길을 첫째는 알고 있었다. 내 아버지 집은 지역에서도 물어보면 누구나 알만한 곳이었지만, 아이들이 찾지 못할까 걱정됐다. 여러 번 다짐을 받고 아이들만 야간열차에 태워 보냈다.

‘산에 남은 나와 막내가 잘못되더라도 나머지 두 아이는 살 수 있겠다’는 안도감이 몰려왔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들은 돌아왔다. 손에는 어머니의 편지가 들려 있었다.

“요년아 요년아, 남들이 못한 유학을 서울까지 보냈더니 밥도 못 빌어먹고 자식들 밥까지 빌어먹으려고 여기까지 보냈느냐. 동네 우사스러우니까 다시는 오지 마라.”

정리=박효진 기자 imher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