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강영애 (9) 따뜻하게 맞아준 교회에서 성도들 도움으로 임시 기거

입력 2025-04-14 03:04
강영애 목사가 남편에게 쫓겨난 뒤 삼 남매와 함께 헤맸던 서울 서대문구 영천시장의 1970년대 모습. 서대문구청 블로그 캡처

울고 있던 아이들을 일으켜 세워 손을 잡고 불빛 하나 없는 서대문 영천시장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새벽이 밝아오고 있었지만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한참 걷다 보니 사직터널 옆 언덕 위에 십자가가 보였다. 우리는 그 십자가만 바라보며 무작정 걸었다.

교회 문을 열고 들어서자 성도들이 “난로 옆으로 오세요”라며 따뜻하게 맞아줬다. 나는 아이들만 그 곁으로 보내고 멀찍이 떨어져 앉았다. 매 맞은 얼굴을 보여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고개를 깊이 숙인 채 기도하는 척하며 눈물을 삼켰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한 할머니가 다가와 말했다. “나갈 땐 문만 꼭 닫고 가면 돼요.” 나는 고개를 숙인 채 끄덕였다. 난로 옆에서 곤히 잠든 아이들을 바라보니 가슴 한켠이 먹먹해졌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할 틈도 없었다. 그저 다가오는 하루가 걱정이었다. 교회를 나서며 문득 간판을 올려다보니 ‘영락농인교회’라는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밤이 돼 다시 교회로 들어갔다. 반갑게 맞이해주는 할머니들의 정겨운 인사말이 이토록 따뜻하게 느껴질 줄은 몰랐다. “교회 간다고 아빠가 때려서 도망 나왔다”는 막내의 입방정에 할머니들의 손길은 더욱 다정해졌다. 먹을 것도 넉넉히 챙겨주셨다. 그렇게 우리는 보름이 넘도록 밤마다 그 교회에 머물렀다.

아침이면 첫째와 둘째를 학교에 보내고 막내와 함께 영천시장과 서대문형무소 주변을 하염없이 배회했다. 아이들이 돌아올 때까지 그저 걷고 또 걸었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아무 생각도 없었다. 머릿속은 새하얗게 비어 있었다.

보름 넘게 밤마다 찾았던 교회에 더 이상 기대는 것이 미안했고 스스로도 용납되지 않았다. 도망친 그 날, 집에서 일하시던 아주머니를 통해 챙겨온 짐을 둘러메고 삼 남매와 함께 무작정 종로 세검정을 향해 걸었다. 그렇게 예닐곱 시간을 쉬지 않고 걸었다.

그때 눈앞에 산으로 향하는 오르막길이 보였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 저 위에 올라가서 죽자. 거리에서 죽는 것보단 낫겠지.’

조그마한 개울을 따라 산길을 오르기 시작했지만 눈앞은 캄캄했다. 불빛도 사람도, 어떤 기척도 없었다. 희미하게 스며드는 은하수의 희미한 빛만을 따라 한 걸음씩 나아갔다.

그런데 갑자기 막내가 계곡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나는 망설일 틈도 없이 몸을 던졌다. 함께 언덕을 굴러 내려갔다. 다행히 아이는 나무를 붙잡고 있었다.

“안 다쳤어?” “응 괜찮아 엄마.”

막내를 품에 안고 다시 언덕을 오르기 시작했다. 나무를 붙잡고 한 걸음씩 올라가다 보니 어렴풋이 길이 나타났다. 그 길을 따라 한참을 더 올라가니 깊은 산 속 작은 암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암자에 불이 켜져 있었지만, 이상하게 반가움보다 두려움이 먼저 밀려왔다.

다시 길을 따라 산 위쪽으로 올라갔다. 얼마나 걸었을까. 멀리서 작은 불빛 하나가 어렴풋이 보였다. 그 불빛을 향해 다가가자 웅성웅성 사람들의 소리가 들려왔다. 가까이 가보니 굴처럼 생긴 움막 안에 여섯, 일곱 명쯤 되는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정리=박효진 기자 imher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