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가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소추안을 가결했던 2004년 3월에 갓 대학을 졸업한 백수였다. 헌정사상 처음으로 벌어진 탄핵 재판의 한 장면을 서울역사에서 봤던 기억이 있다. 그해 7월 언론사에 입사했고, 5년 뒤 검찰 수사 끝에 노 전 대통령이 투신했다.
노 전 대통령 탄핵, 극단적 정치적 대립, 비극적 결말은 그야말로 국민적 충격을 안겨줬다. 어느 정도 물밑 협상 문화가 남아 있던 정치권은 점차 상대의 싹까지 잘라내는 수준으로 적대적으로 변했다. 이명박정부 당시 야권에선 “정부가 정말 밥그릇까지 끊으려 한다”는 토로가 나왔다. 광우병 파동으로 정권 시작부터 레임덕에 시달렸던 이명박정부의 정치적 보복으로 여겨졌다. 진영별 방송사 장악, 상대 진영 초토화에 가까운 청산 작업 등 정쟁이 과격해진 것도 이때부터다.
2017년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이 헌정사상 처음으로 헌법재판소에서 인용됐다. 군부독재 시절에나 있었을 법한 비선실세라는 사람들, 이들이 관련된 사건이 잇달아 드러나면서 탄핵 절차가 진행됐다. 국민 분노가 얼마나 컸던지 당시 여당 국회의원조차 탄핵 찬성표를 던질 수밖에 없었다. 다만 노 전 대통령과 달리 실제 탄핵이 인용될 분위기가 되자 정권도 그냥 포기하진 않았다. 박근혜정부 청와대는 2016년 책임총리제 도입(당시 김종인 민주당 비상대책위원회 대표가 거론됐다)을 추진했고, 막바지에는 임기단축 개헌과 퇴진 로드맵까지 내놓았다. 박 전 대통령은 2016년 11월 3차 대국민담회에서 “제 대통령직 임기 단축을 포함한 진퇴 문제를 국회 결정에 맡기겠다”고 밝혔다. 여야가 합의해 조기 대선 일정을 확정하면 자신은 그에 맞춰 하야하겠다는 이른바 ‘질서 있는 퇴진론’이었다.
박 전 대통령이 제안한 개헌은 사실상 ‘최순실 방어용’이었다. 그러나 박 전 대통령이 공식적으로 ‘재가’하자 망설이던 친박(친박근혜)계까지 국회 개헌 모임에 가입했고, 이내 의결정족수인 200명을 넘어섰다. 4년 중임제, 의원 내각제, 이원집정부제 등이 논의됐다. 국회가 마음만 먹으면 1987년 이후 29년 만에 제7공화국이 출범할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 역시 마지막에 국회 문턱을 넘지 못했다. 차기 대선후보 지지율 1위였던 문재인 전 대통령이 개헌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대신 대선 후인 2018년 지방선거와 동시에 개헌 국민투표를 하자는 안을 내놓았다. 이어 대통령 취임 후 2018년 실제 대통령 개헌안을 발의했지만 이번엔 다시 야당 반대로 무산됐다.
그렇게 잊혀졌던 개헌이 윤석열 전 대통령 탄핵을 계기로 재부상하고 있다. 제왕적 대통령제의 부작용이 윤석열정부에서 극명하게 드러난 탓이다. 그간 사회 각 분야에서도 끊임없이 개헌 필요성이 제기돼 온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박근혜정부의 방탄용 제안 때문에 논의 자체의 무게감을 잃었고, 차기 대선 유력 주자의 반대가 마지막 걸림돌로 작용했다. 이번에도 이재명 민주당 전 대표의 반대로 대선·개헌 동시투표는 사실상 무산 수순에 들어갔다. 당장 우원식 국회의장이 제안 사흘 만에 이를 철회했다. 설사 다음 대통령이 개헌안을 내놓더라도 여러 정략적 이유로 결국 ‘문재인 개헌안’ 버전2 처지가 될 것이다.
2004년 노 전 대통령 이후 다신 없을 것 같았던 대통령 탄핵이 벌써 20년 새 두 번이나 더 이뤄졌다. 민주당의 국무위원 줄탄핵까지 겹치며 탄핵이란 극단의 장치는 불운하게도 정치의 상수가 되고 있다. 더불어 국가중대사인 개헌 논의는 탄핵 부속품 신세로 전락했다. 2018년 이후 7년간 국회는 무얼 하다 이제야 다시 개헌을 얘기할까. 기회주의적으로 비치는 개헌 시도가 잘된다면 그게 더 이상한 노릇이다.
강준구 콘텐츠랩장 eye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