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3년 출간된 ‘통일찬송가’는 한국 선교 100년을 기념해 초교파적 합의를 거쳐 제작한 찬송가다. 당시 20여 교단이 하나의 찬송가를 예배에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60년대 한국교회는 ‘합동찬송가’ ‘새찬송가’ ‘개편찬송가’ 등 3개의 찬송가를 각 교단의 선택에 따라 사용했다. 그러다 보니 하나의 찬송가로 통일하자는 의견이 대두됐다.
이에 교단 연합모임인 한국기독교지도자협의회가 ‘찬송가합동추진위원회’(회장 강신명 목사)를 구성했고 76년 7월 21일 찬송가합동추진위원회 회의를 통해 3개 찬송가를 한 권의 찬송가로 편찬, 출판하기로 하고 제작 원칙을 결의했다. 이듬해인 77년 2월 3일 한국찬송가위원회와 새찬송가위원회는 ‘한국찬송가통일위원회’를 조직한 후 운영 지침을 마련했다. 78년 개최된 대한예수교장로회(예장) 통합 제63회 총회 회의록(90쪽)에 보면 7가지 ‘한국 찬송가 통일원칙’을 수립했다.
“합동, 새, 개편찬송가를 통일시키는 일을 한다. 1항의 3개 찬송가를 통일하는 작업 과정에서 가사 또는 곡이 상이할 때 가, 나 장으로 수록할 수 있다. 가사(번역된 것)의 수정은 성서적인 면과 신학적인 면을 고려하여 수정할 수 있다. 찬송가의 통일 작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사용 빈도수를 참작하여 각 찬송가의 특징을 살리며 신작 찬송을 엄선하여 추가할 수 있다. 교독문은 한글 개역성경을 기준으로 작업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찬송가 통일을 위한 경비는 각 교단 협조금 및 기관, 독지가의 헌금으로 충당한다. 찬송가 수익금 문제는 통일작업 완성 후 상황에 따라 하도록 한다.”(단 교세에 따라 배당할 것을 원칙으로 함)
78년 5월 제3회 찬송가통일위원회 총회에서 예장합동은 새찬송가위원회 위원의 확대를 요구했다. 논의 끝에 이 제안은 81년 4월 양측 위원회의 합의로 수용됐다. 이후 찬송가합동추진위원회는 81년 4월 9일 ‘한국찬송가공회’로 명칭을 변경하고 편집 작업에 박차를 가해 83년 11월, 총 558곡으로 구성된 통일찬송가를 출간했다. 82년 예장통합 제67차 총회 회의록 찬송가위원회보고서의 ‘한국찬송가공회 공약’ 중 몇 가지 주요 조항을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제1조(명칭) 본회는 한국찬송가공회라고 칭한다. 제4조(구성) 본회는 판권을 소유한 양측 대표 4인씩 8인과 기타 교단 대표 4인으로 한해 12인으로 구성하여 최고 의결기관이 된다.”
당시 한국찬송가위원회(개편찬송가 판권소유)와 새찬송가위원회(새찬송가 판권소유)는 각각 찬송가의 판권을 가지고 한국찬송가공회라는 교회 연합기관을 설립했다. 또 4개 분과(가사 음악 교독문 편집)로 나눠 체계적으로 편집 작업을 진행했다.
특이한 점은 이 같은 편집 체제는 새찬송가위원회를 존중해 새찬송가의 체제를 거의 그대로 수용한 것이다. 교독문은 한국찬송가위원회를 존중해 개편찬송가의 체제를 수용했다. 통일찬송가에 수록된 한국인 창작 찬송가 18곡은 개편찬송가의 한국인 창작 찬송가 27곡 중에서 선별했다. 양 위원회는 편집 과정에서 서로 존중하면서 편찬을 진행했다.
일각에서는 통일찬송가의 선별 기준이 ‘정치적 협상의 결과물일 뿐 좋은 찬송가집을 완성도 있게 만들겠다는 의지가 과연 있는지 의문스럽다’는 비판을 제기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은 한국교회 다수 교단이 각자의 이해관계를 접고 하나의 찬송가를 만들기 위해 협의하는 과정이 매우 복잡하고 힘들었다는 점을 방증할 수 있다. 통일찬송가를 향한 다양한 비판은 오히려 훗날 큰 자양분이 되어 ‘21세기 새찬송가’를 제작하는 동기로 작용했다. 통일찬송가의 부족한 부분을 보완해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찬송가 제작에 밑거름이 된 것이다.
통일찬송가는 이런 과정을 거쳐 선을 보였다. 이후 2006년 21세기 새찬송가가 출간되기까지 23년간 한국교회 예배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통일찬송가는 아직도 성도들에게 익숙하고 사랑을 받아 일부 교회에서는 계속 사용하고 있다.
통일찬송가는 대다수 한국교회 성도들이 교파를 초월해 최초로 하나의 찬송가를 사용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역사적으로 큰 의미를 지닌다.
김용남 한국찬송가공회 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