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은 사건의 나열 아닌 세상 해석하는 방식…
다른 사람의 서사와 연결하려는 시도다
다른 사람의 서사와 연결하려는 시도다
어릴 때 나는 공상을 지나치게 좋아해서 어른들을 걱정시키는 아이였다. 어른들은 내가 현실과 상상의 경계선이 불분명한 말들을 입 밖으로 꺼내면 화를 내거나 난처한 표정을 짓곤 했다. 그들에게 증명할 수 없는 말은 모두 거짓이었으니까.
나는 몇 번이나 거짓말쟁이가 되고 나서야 꺼낼 수 없는 말들을 일기장에 쓰기 시작했다. 보이지도, 만져지지도 않는 현실이 그토록 많이 적힌 기록이 또 있을까. 하지만 내게 그 말들은 아직 일어나지 않았거나 불투명했을 뿐 거짓은 아니었다. 증명할 수 없지만 진실을 향해 열려 있는 말, 그때는 그것을 뭐라고 불러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글을 쓰기 시작한 뒤로 그 일기장을 자주 떠올린다. 선택된 기억, 실처럼 엉킨 사건들, 미리 엿본 미래. 그 글들은 단순히 일어난 사건의 나열이 아닌, 내가 세계를 바라보고 해석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니 그 기록의 다른 이름은 ‘이야기’가 아닐까.
프랑스 철학자 폴 리쾨르는 인간을 ‘호모 나렌스’, 서사를 통해 자신을 이해하고, 정체성을 만들며, 세계를 이해하는 존재라고 말했다. 나 역시 삶을 이야기 형태로 기억하고, 그 이야기를 통해 자아를 형성해 왔다.
어쩌면 내가 ‘사실’이라 믿는 것조차 이야기의 한 조각에 불과할지도 모르겠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쓰는 사람에게 이야기란 단순한 작업의 결과물이 아닌, 반드시 탐구해야 할 존재 방식일 것이다.
이야기란 무엇일까. 누군가는 기억의 서사를 떠올릴 것이고, 또 누군가는 허구를 말할 것이다. 각자의 정의는 다양하겠지만, 중요한 것은 모든 이야기에는 구조가 있다는 사실이다. 원인과 결과, 시작과 중간과 끝, 혹은 어떤 흐름. 이야기의 정체성을 결정짓는 것은 구조이고 그 구조를 정하는 것은 말하는 사람이다.
때때로 ‘누가 말하느냐’는 ‘무엇을 말하느냐’보다 더 중요하다. 누가, 어떤 관점으로 세계를 바라보느냐에 따라 구조도, 의미도 달라지기 때문이다. 삶도 다르지 않다. 현실은 그 자체로 완전한 실체가 아니라, 우리가 보기로 선택한 것들과 해석한 의미로 구성된다. 어쩌면 우리는 모두, 각자의 이야기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중립적인 이야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야기는 세계를 바라보는 틀이고, 그 틀 안에는 저마다의 가치 판단이 들어 있다. 또 어떤 목소리를 중심에 두면서 다른 목소리를 지우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중요한 것은 이야기의 사실성이 아니라, 그것이 어떻게 구성되었는지에 대한 자각, 시선과 해석의 정당성일 것이다.
쓰는 사람은 자신이 무엇을 말하는지, 무엇을 배제하는지, 어떤 목소리를 대변하는지를 섬세하게 들여다봐야 한다. 진실을 단정 짓지 않기 위해서, 다른 서사를 지우거나 덮지 않기 위해서다. 나의 경험은 반드시 누군가의 삶과 포개져 있기 마련이니까. 이야기의 윤리는 단순히 거짓과 참을 가르는 일이 아니라, 서로 얽힌 삶에 대한 인식과 책임에 있다.
우리는 각자의 이야기 속에 살아가지만, 나의 이야기는 타인의 이야기와 맞닿아 있다. 모두가 이야기의 중심이자 동시에 가장자리일 수 있고, 진실은 그 이야기들이 포개지는 층위에 존재한다. 그러니 글을 쓴다는 것은 자신의 경험을 타인과 연결하려는 시도이자, 다른 서사와 어떻게 관계를 맺을 수 있는지 자문하는 일이 아닐까.
이야기는 완성된 진실이 아닌, 돼가는 과정에서 의미를 얻는다. 그 목적은 견고한 세계를 짓는 데 있지 않고, 닫힌 세계에 문을 만드는 데 있다. 그 문을 열면 당신과 당신의 이야기가 있을까. 우리의 이야기가 포개지는 순간, 한 번도 발화된 적 없는 새로운 이야기가 태어날지도 모른다. 물론 이 상상은 거짓이 아니다. 아직 만나지 못했지만 어딘가에 있는 현실, 진실을 향해 열려 있는 말이다.
신유진 작가·번역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