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강영애 (8) 다시 시작된 남편의 폭력… 추운 겨울 맨몸으로 쫓겨나

입력 2025-04-11 03:05
1970년대 강영애 목사가 서울 화곡동에서 서대문구 독립문으로 다시 이사해 온 당시의 독립문 일대 모습. 서울역사아카이브 홈페이지

저 멀리 희미한 형체 속에서 십자가가 눈에 들어왔다. 힘을 내어 한 걸음 또 한 걸음 내디디며 그곳을 향해 다가갔다.

문을 열고 예배당으로 들어서면서 바닥에 주저앉듯 무너져 상체를 앞으로 숙인 채 울기 시작했다. 잠시 후 인기척에 놀라 몸을 일으키니 현관등이 켜지며 한 할머니가 들어왔다. 할머니는 추운 날씨에 맨바닥에 앉아 있는 나를 보고 안쓰러운 듯 방석을 건네며 물었다. “어떻게 오셨나요.”

나는 “석칠이네 집을 지나 울퉁불퉁한 길을 따라 왔다”고 대답했다. 그 말을 들은 할머니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말했다.

“아이고 그럼 공동묘지를 지나오신 거네요.”

그제야 내가 지나온 길이 공동묘지였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성전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마음이 편했고 기도하고 돌아오는 시간이 참 행복했다.

돌아오는 길에 아이들을 위해 쌀과 그릇, 연탄을 샀다. 30여년을 살아오며 단 한 번도 살아본 적 없는 단칸방에서 이제는 아이들과 살아야 했다. 막내는 짙은 호기심을 감추지 못하는 이웃에게 천진하게 말했다.

“교회 간다고 아버지가 때려서 도망 나왔어요.”

10리 밖의 일도 하루면 퍼지는 시골에서 남편에게 맞고 도망친 도시 아줌마 이야기는 최고의 가십거리였다. ‘살아야 하는데 이웃들의 시선이 뭐 그리 중요하랴’ 싶었지만 한 달도 되지 않아 남편이 찾아왔다.

남편은 매일 저녁 무렵 찾아와 아이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다 새벽이면 돌아가곤 했다. 올 때마다 생활비를 놓고 갔다. 하지만 나는 그가 올 때마다 자리를 피해 교회에 머물렀다. 내가 도망쳐 나올 때 가지고 나온 돈에 대해서 남편은 단 한마디도 묻지 않았다.

그렇게 시작된 단칸방 생활을 이어가던 어느 날, 남편은 강서구 화곡동에 아담한 집을 마련했다. 그곳으로 옮겨간 후부터는 아이들과 함께 안락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남편이 때리지 않는 게 가장 큰 위안이었다. 다행히 마음 둘 수 있는 교회도 가까이에 있었다. 그곳의 담임이었던 여전도사는 내가 마음을 기대고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였다. 그녀는 나를 교회 일에 자주 불렀고 늘 ‘집사님’이라 불렀다.

하지만 교회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자 남편의 의심이 다시 시작됐다. 우리는 다시 독립문 근처로 이사했다. 그곳에서도 나는 동네 가까이 있는 교회에 출석하며 여선교회 회장직도 맡아 열심히 섬겼다. 그럴 때면 남편의 의심은 어김없이 폭력으로 이어졌다. 이제는 나뿐만 아니라 아이들까지 때리는 것을 서슴지 않았다. 두들겨 맞고 집을 도망치는 일이 반복됐다. 나는 멍든 얼굴을 감추기 위해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다니는 것이 일상이 됐다.

매 맞는 날이 거듭되면서 눈까지 다쳐 안대를 해야 했다. 12월 어느 날, 살을 에는 듯한 한겨울에 나는 아이 셋과 함께 집에서 쫓겨났다. 겉옷도 걸치지 못하고 길바닥에 엎드려 울고 있는 아이들을 부둥켜안았다.

그런데 더 이상 맞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이었을까. 흘러내리는 눈물 속에 추위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어둠이 짙어지는 하늘을 향해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하나님, 감사합니다”를 반복해 울부짖었다.

정리=박효진 기자 imher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