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 다시 봄이 온다는 믿음

입력 2025-04-11 00:35

“눈앞에 호수가 있고/나는 시민과 조경이 익숙한 듯이/벤치에 앉아서// 방금 점심을 먹고 식당에서 나오다가/묶여 있는 개를 바라보는 회사원처럼/호수에 대해/아무 생각이 없었다// 나는 그게 마음에 들었다/내가 배가 부르다는 게/큰 개가 묶여 있다는 게// 누가 길을 물어서/여기 사는 사람이 아니라고 대답했다/호수만 보이는데// (중략) 오늘 저녁은 뭐 먹지 생각하면서/호수를 따라 걸었다/삼십분 전에 본 사람이/다시 옆을 달리고 있다.” ‘온 우주가 바라는 나의 건강한 삶’(창비, 2024)

남현지 시인의 ‘호수 공원’을 읽고 나서 산책로로 향한다. 완연한 봄이다. 바람이 불자 꽃 비린내가 콧속으로 물큰 들이닥친다. 지천이 봄꽃으로 가득하다. 노란 개나리의 행렬. 차가 지나갈 때마다 벚꽃 무더기가 길 가장자리로 풀썩 물러난다. 조팝나무도 촘촘히 꽃망울을 달고, 곧게 핀 수선화는 슬쩍 건드리면 종소리가 울릴 듯이 조그만 금종을 달았다. 현란한 봄빛에 눈이 찔려, 잠시 현기증이 돈다.

지난겨울의 삭풍은 얼마나 가혹했던가. 씨앗이 싹을 밀어내기도 전에 산불이 거대한 불기둥을 세우며 타올랐다. 게다가 12월 3일 밤 계엄이 선포된 날, 나는 세상에 배반당한 것처럼 상처받았다. 비단 나뿐이랴. 뉴스를 보다가 근심을 안고 잠을 설친 이들도 많았으리라. 그리고 지난 4월 4일. “주문 피청구인 대통령 윤석열을 파면한다”라고 탄핵 인용문을 낭독하는 목소리가 들려올 때, 여러 감정이 얽혀 코가 시큰했다. 그것은 하나로 뭉뚱그릴 수 있는 감정이 아니었다. 특정 당을 지지하거나, 좌우로 편 가르는 마음도 아니었다. 민주 시민의 힘으로 일상의 자리를 지켜냈다는 안도. 그 평범에 이르는 과정이 이토록 어렵고 귀한 것임을 비로소 실감했기 때문이다. 상처 없는 회복은 없다. 불이 지나간 자리에 풀이 돋고, 어떤 상처는 훈장이 된다. 민주 시민이 다시 역사를 쓰는 광장에서.

신미나 시인 겸 웹툰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