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샛강에서] 폭싹 안아줄 마을이 있다면

입력 2025-04-10 00:32

생을 돌아보면 흐릿하지만 잊히지 않는 장면들이 있다. 몸뚱이보다 큰 책가방을 둘러멘 채 외할머니 손을 잡고 나서는 하굣길, 동네 구멍가게에 들러 초코파이 하나를 집어드는 것이 일상의 낙이었던 초등학생 시절 이야기다. 주인 할아버지는 손사래 치는 외할머니를 아랑곳하지 않고 내 주머니에 왕방울 사탕을 욱여넣고선 “암시롱 안혀. 오매. 야는 그새 솔찬히 커부렀어. 밥 잘 묵지?”라며 뒤통수를 쓰다듬어 주시곤 했다. 흑백사진 같은 장면을 떠올려보면 아이는 한 가정 안에서, 부모 한 쌍 아래서만 자라는 게 아니었다. 동네에서 자라고 동네 사람들이 촘촘하게 엮어 둔 관계 안에서 자랐다.

최근 세대를 불문하고 인종과 문화권을 뛰어넘어 시청자들을 울리고 웃겼던 넷플릭스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는 각 회마다 뭉근한 감동을 주는 대사와 시집을 읊조리는 듯 덧댄 내레이션으로 큰 사랑을 받았다. 그중 기억에 남는 문장은 ‘한 아이를 키우는 데는 온 마을이 필요하다’이다.

드라마 속 제주 마을은 그렇게 여러 아이를 품었다. 부모의 자리가 비면 이웃이 그 자리를 채웠고, 가난의 틈에 동네 사람들은 온기를 메워 넣었다. 아이의 잘못 앞에 혼내는 어른이 있었고, 아이의 꿈 앞에 기꺼이 손 내미는 어른이 있었다. 엄마가 바쁠 때 동네 어른들이 손을 내어 주인공 금명이를 챙겨주고, 굴곡진 가정사가 찾아올 때, 인생의 기로에 서게 돼 고민할 때도 누군가는 등을 밀어준다. 지금 우리의 동네는 어떤 모습일까.

한국 사회엔 개인주의가 일상으로 자리잡은 지 오래다. 1인 가구가 늘고 관계는 선택의 영역이 됐다. 아이 키우는 일이 철저하게 사적이며 부모 개인의 몫으로 축소되고 육아가 고립과 외로움으로 연결되는 시대. 그러다 보니 부모는 지치고 아이는 외롭다.

교회마저 이 변화 앞에 자유롭지 못하다. 그러나 본래 교회란 그런 곳 아니었던가. 누군가 힘들면 다가가서 도와주고, 누군가 지치면 대신 품어주고, 부모의 한계를 공동체가 채워주는 울타리 같은 곳. 한 아이를 키우는 데 온 마을이 필요하다면 오늘 우리 시대 그 마을은 바로 교회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극 중 아버지 관식이 딸 금명의 결혼을 앞두고 예비사위와 거하게 술잔을 나눈 채 말을 건넨다. “내가 너에게 나의 천국을 보낸다.” 담담했지만, 오래도록 마음에 남는 장면이다. 관식이 말하는 ‘천국’은 다른 게 아니다. 그저 평생 품고 아껴 키운 딸, 자신의 삶 그 자체였다. 자신의 천국을 건네는 일. 아이를 키워내고 부모의 둥지를 떠나 보낸다는 건 그런 일인지 모른다. 부모가 쌓아온 모든 시간과 마음, 그 세계 전체를 내어주는 일말이다. 부족하고, 어설프고, 때론 후회스러운 시간들이지만 그래도 버텨내고 살아낸 부모의 삶 전체가 자녀에게는 천국의 일부가 되어 흘러간다.

서로 사랑하고, 서로 돌보며, 함께 자라가라고 만든 ‘마을’이라는 자리. 작은 천국 같은 그 자리가 회복될 때, 부모의 마음도 조금은 덜 외롭고, 아이의 자람도 조금은 더 따뜻할 것이다. 아이를 키우는 일은 여전히 쉽지 않다. 부모의 미안함도, 아이의 서운함도 여전할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혼자만의 싸움은 아니었으면 한다. 결국 육아란, 공동체란 그런 것이다. 함께 울고 함께 웃는 일. 함께 버티고 함께 품는 일. 내가 다 못해도 괜찮으며 우리가 함께이기에 가능한 일. 그리고 그런 부모들이 공동체로 함께 걸어가는 길 끝에서 누군가 이렇게 말해주면 좋겠다.

“폭싹 속았수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정말 애 많이 쓰셨습니다.” 그 한마디가 오늘도 부모를 버티게 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 아이들을 함께 키우게 할 것이다.

최기영 미션탐사부 차장 ky710@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