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전 세계를 상대로 부과한 상호관세가 9일(현지시간) 발효됐다. 지난 2일 트럼프가 발표하기 직전까지도 관세가 실행되지 않을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다. 미국 정부가 거의 1세기 만에 꺼내든 관세 카드는 미국에 불리한 일부 무역 관행을 개선하기 위한 트럼프 특유의 협상술 정도로 여겨졌다. 하지만 실제로 관세가 부과됐고 관세율은 예상보다 훨씬 높았다. 국제 금융시장이 먼저 파랗게 질렸고, 세계는 무역전쟁과 경기 침체의 공포에 휩싸였다.
트럼프는 “수십 년 동안 우리나라는 가까운 나라든 먼 나라든, 우방이든 적국이든 약탈과 침탈, 착취를 당해 왔다”며 상호관세를 부과한 날을 ‘해방의 날’이라고 불렀다. 현실은 전쟁 선포였다. 이날 한국을 비롯한 세계 대다수 언론들은 “글로벌 무역전쟁이 시작됐다”고 보도했다. 트럼프는 “관세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단어”라고 했다. 그러나 자유무역 시대에 관세는 상대국을 공격하는 무기로 여겨진다. 그는 “관세가 미국에 성장을 가져다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경제 전문가들은 관세의 상당 부분이 미국 소비자들 부담으로 돌아올 것이고 결과적으로 인플레이션을 초래할 것이라고 우려한다.
트럼프의 관세에 대한 주장은 현대 경제학이나 세계 경제사와 충돌한다. 트럼프의 관세로 미국 경제가 재건될 수 있다고 믿는 경제 전문가도 찾아보기 어렵다. 글로벌 자유무역 체제의 기획자이자 최대 수혜자가 미국이라는 게 상식이기 때문이다. 트럼프는 미국 제조업의 위기를 강조하는데, 미국이 고부가가치의 금융업과 서비스업으로 산업 체제를 전환하면서 거둔 번영을 계산에서 빼놓고 있다. 트럼프는 관세를 밀어붙이며 미국은 착취당해 왔다고, 관세는 아름답다고, 미국 경제가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반복해서 말했다. 이것은 국민에 대한 가스라이팅, 정치적 가스라이팅이라고 할 수 있다.
거짓말과 궤변으로 상대의 논리를 무너뜨리고 심리적으로 지배하는 가스라이팅이란 말은 개인적인 관계를 설명하는 데 주로 사용되지만 정치와 권력의 세계에서도 일어난다. 나쁜 남자가 가스라이팅을 하듯 나쁜 권력도 권위를 이용해 허위 정보와 거짓말을 반복함으로써 국민을 가스라이팅을 한다.
한국 국민들도 윤석열 전 대통령이 지난해 12월 3일 계엄령을 선포한 이후 가스라이팅에 시달렸다. 그는 21세기 한국에 40여년 만에 다시 계엄령을 불러내고는 “비상대권”이며 “호소용 계엄”이라고 강변했다. 거대 야당의 횡포에 맞서기 위해 계엄을 할 수밖에 없었다고 주장했다. 또 국민들의 저항과 군인들의 비협조, 국회의원들의 빠른 대응으로 계엄령이 조기 해제된 걸 두고 “2시간짜리 계엄이 어디 있느냐”며 진짜 계엄이 아니라는 증거처럼 제시했다. 헌법재판소가 대통령 탄핵을 인용할 때까지 123일 동안 거짓말과 거짓말, 궤변에 궤변이 이어졌다. 시민들은 법을 공부하고 뉴스를 찾아보고 온라인에서 의견을 주고받으며 그 거짓 논리들과 싸워야 했다. 일부는 가스라이팅에 넘어가 “계몽됐다”고 선언했다. 거짓말과 궤변들을 통쾌하게 깨뜨린 헌재 결정문이 나오고 나서야 가스라이팅이 끝났다.
가스라이팅은 통치 전략이나 선거 전략으로 사용된다. ‘윤석열 탄핵’으로 맞게 된 6월 대선에서도 가스라이팅이 횡행할 것이다. 국민의힘은 탄핵 국면에서 드러낸 극우 색채를 다시 가린 채 정통 보수 세력을 자임할 것이다. 두 명의 자당 대통령이 탄핵 당했는데 반성도 책임도 개혁도 없이 다시 후보를 내고 국가를 맡겨 달라고 호소할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는 그 말을 믿을 것이다. 나쁜 남자에게 가스라이팅을 당한 연인처럼.
김남중 국제부 선임기자 nj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