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의성군에 사는 A씨(56)는 지난달 25일 ‘괴물 산불’을 겪은 뒤부터 깊은 잠에 들지 못했다. 새벽에 눈을 뜨면 마을을 둘러싼 시뻘건 불길이 떠올라 가슴이 쿵쾅거렸다. A씨는 “불붙은 산에서 바람이 치니까 용 울음소리 같은 게 났다”며 “불티와 연기가 뒤섞여 숨도 제대로 못 쉬고 정말 끔찍했다”고 말했다.
경북 안동에서 비닐하우스 19개동을 운영하는 B씨(61)는 이번 산불로 큰 재산 피해를 입었다. 하루아침에 농장이 잿더미로 변하고 이웃이 목숨을 잃었다는 소식까지 들려왔다. 우울감이 심해졌다. 그는 “매일 두통이 반복돼 진통제를 먹고 있다”고 말했다.
보건복지부 국립트라우마센터는 지난달 22일부터 지난 5일까지 6237명이 경북·경남·울산 산불로 심리 상담을 받았다고 8일 밝혔다. 이 중 166명은 병원 등 다른 기관으로 연계됐다. 심리 상담 없이 정신건강 관련 정보를 받은 경우도 1만5554건에 달했다. 산불 관련 심리 상담은 행정안전부에서 총괄하다가 지난 1일부터 국가트라우마센터 통합심리지원단이 담당하고 있다.
센터 관계자는 “상담 건수가 역대 다른 재난보다 많은 편”이라며 “체감상 90% 이상이 고령층”이라고 말했다. 정부가 파악한 이번 산불 영향 구역은 4만8200ha로 서울 면적의 80%에 달하는 규모다. 주민 3000명이 대피했고 사상자는 82명으로 집계됐다. 역대급 규모의 산불은 그만큼 깊은 상처를 남겼다. 이 관계자는 “산불로 인한 재난은 삶의 터전이 사라지는 것을 목격하는 경험이기 때문에 큰 상실감을 느끼게 된다”고 설명했다.
인생 경험이 풍부한 고령층은 트라우마 진단 기준에서 고위험군에 속하지는 않는다. 다만 지병이 있거나 홀로 지내는 경우가 많아 회복이 더딜 수 있다. 더욱이 현재는 농번기이기 때문에 마냥 일손을 놓기도 어렵다. 산불 흔적이 남은 논밭을 보면서 트라우마는 더 깊어질 수 있다.
현장에 투입됐던 공무원이나 산불 진화 대원 등 ‘3차 경험자’들의 심리 상태도 우려되는 상황이다. 한 소방관은 “잎이 무성한 나무 위쪽까지 불에 타면 온도가 1000도를 넘는다”며 “그 속에서 긴장하며 진화했던 기억과 불길의 잔상이 아직도 눈앞에 아른거린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대형 재난으로 인한 심리적 트라우마는 사태가 어느 정도 수습되고 사회적 관심에서 멀어질 때 더 세심한 관리가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심민영 국가트라우마센터장은 “관심과 도움이 집중되는 시기가 끝나고 현실을 마주하면 피해자들은 더 큰 괴로움에 빠진다”며 “중장기 지원과 지속적인 모니터링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심 센터장은 “재난을 겪은 뒤 나타나는 두근거림 등은 자연스러운 증상이지만 한 달 이상 지속되면 트라우마가 될 수 있어 신속한 지원이 필수적”이라며 “이번 피해 지역에는 정신건강의학과 의료 기관이 없는 곳도 있어 도움이 더 절실하다”고 강조했다.
박은주 기자 wn1247@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