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강영애 (6) 이사 온 집이 무당 살던 집… 성령 역사 통해 예수님 영접

입력 2025-04-09 03:04
강순애 목사는 1968년 남편의 직장을 따라 두 딸을 데리고 광주에서 서울로 올라와 마포구 공덕동에 정착했다. 자료 사진은 그 무렵 서울역 전경. 서울역사아카이브 제공

남편은 해방 후 개성에서 광주로 내려온 사람이었다. 그는 개성에서 중요한 행정 책임자로 일하던 이의 조카였다. 형제 중에는 일본 유학을 다녀온 이도 있었고 그 역시 대학을 졸업한 뒤 평생을 사업가로 살아왔다. 집안에는 의사도 많았다.

결혼 후 살았던 신혼집은 친정아버지가 마련해주셨다. 부엌일을 도와주는 아주머니도 있었고 생활에 필요한 물건은 집에서 가져오면 됐다. 나는 버선 하나 제대로 빨지 못해 그냥 버리기 일쑤였다.

결혼 후 뜻밖에 당구장을 인수하게 됐다. 황금동 친정에 세 들어 살던 당구장 주인이 어려움에 처하자 내게 운영을 제안했다. 구매 대금은 일수를 하던 친구에게 빌렸고 집안에는 비밀로 했다.

광주 도심 한복판에 있던 당구장은 늘 손님들로 붐볐다. 돈을 담던 과일 바구니에는 현찰이 수북이 쌓였다. 나는 오후 늦게 가서 수금만 하면 됐다.

하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갓 결혼한 새댁이 당구장을 운영한다는 사실을 안 시댁과 친정아버지 모두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국 한 달도 채 안 돼 당구장 주인 생활은 끝이 났다.

남편과 나는 1남 2녀를 뒀다. 결혼 8년째 되던 해 출판 일을 하던 남편을 따라 서울로 올라왔다. 손주를 좋아하시던 친정아버지를 생각해 첫째 아들만 광주에 맡기고 두 딸은 데리고 서울로 향했다. 그때 내 나이 서른셋이었다. 우리는 마포 공덕동에 집을 마련했다.

공덕동은 아현동을 지나 이화여대까지 직선거리로는 채 2㎞도 되지 않는 가까운 곳이었다. 대학 시절 내내 순화동(서소문 역사공원과 숭례문 사이)에 살았던 내게 공덕동은 낯설지 않은 동네였다.

우리 가족은 공덕동 집수리를 위해 이웃집에서 20일간 머물렀다. 그때 꿈을 꿨는데 꿈속에서 하얀 광목이 위에서 아래로 길게 드리워진 끝에 성경책이 놓여 있었다. 성경책 양옆에는 촛불과 칼이 있었다. 촛불은 말씀을 상징하는 것처럼 느껴졌지만 칼의 의미는 알 수 없었다.

그 당시 나는 매일 성경을 읽거나 기도 없이는 살 수 없는 수준의 신앙인이 아니었다. 그런 내게 이런 꿈은 당혹스럽기만 했다. 그런데 다음 날 집주인은 “그 집에 무당이 오래 살았었다”는 사실을 내게 알려줬다.

그런 꿈을 꾼 뒤로도 나는 기도하거나 교회를 다니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몇 집 건너 예배를 드리는 집이 있었는데 찬송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에 끌리듯 그곳에 들어가보니 넓은 대청마루에서 스무 명 남짓한 사람들이 앉아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나는 마루 끝에 조용히 걸터앉았다. 그저 귀동냥이나 해볼 참이었다.

그런데 예배 내내 내 몸이 계속 떨리기 시작했다. 어떻게든 멈춰보려 했지만 되지 않았다. 나중에는 손끝에 피가 안 통할 정도로 아팠다. 결국 다리까지 떨리기 시작했다. 떨림을 참아가며 그 자리에 앉아 끝까지 예배를 드렸다.

예배가 끝난 뒤 목사님이 내게 다가와 “하나님께서 은혜 가운데 역사하신 모습을 봤다”고 말씀하셨다. 그때 나는 그것이 성령의 역사인지 전혀 알지 못했다.

예배 중 온몸이 떨리는 건 매우 낯선 경험이었다. 이화여대 재학 시절 채플 시간에도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일이었다. 받아들이기도, 쉽게 수긍하기도 어려운 경험이었다.

정리=박효진 기자 imher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