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동준 기자의 교회 아재] 떠났지만 남은 이야기, 남길 것을 잃어가는 우리

입력 2025-04-12 03:06
지난달 방문한 충남 논산 병촌성결교회 전경이다. 오른쪽 위 사진은 1971년 교회의 여름성경학교 기념사진. 아래는 교회 순교기념관에 있는 ‘무명유아 성도’의 명패.

올해 교계는 한국기독교 선교 140주년을 기념하는 분위기로 떠들썩하다. 기자도 초기 선교사의 흔적을 찾아 전국을 돌고 있다. “왜 150년도 아닌 140년을 이렇게 중요하게 다루느냐”는 질문도 들었다. 지금 한국교회가 초창기 정신에 기대야 할 만큼 에너지가 떨어졌기 때문 아닐까. 150주년이 되면 당시를 기억할 목소리는 더 희미해질 수 있다.

지난달 충남 논산과 공주를 찾았다. 한국교회총연합이 주최한 근대기독교 문화유산 탐방이었다. 강경은 한때 평양·대구와 함께 3대 시장, 원산과 함께 2대 포구로 불리던 곳이다. 지금은 인구 7000명 남짓이다. 폐교된 초등학교, 어르신들만 남은 거리, 현실이 된 지역 소멸의 풍경이 펼쳐졌다.

한국교회도 다르지 않다. 목회데이터연구소와 한국교회총연합이 지난해 발표한 ‘2050년 교세 추계’에 따르면 현재 60세 이상 교인은 전체의 28.9%다. 2050년엔 43.9%에 달할 전망이다. 예배당 절반이 노인으로 채워진다. 특히 중년 남성 교인은 점점 보이지 않는다. 교회학교는 줄고 봉사자는 노령화됐다. 한 세대가 사라지면 전체 구조가 흔들린다. 벌채된 숲처럼 교회 생태계는 균형을 잃어간다.

탐방단이 찾은 병촌성결교회(이성영 목사)는 쇠락의 현실과 찬란한 기억이 공존하는 공간이었다. 한쪽 벽에는 1971년 여름성경학교 사진이 걸려 있다. 300명 넘던 초등학생의 얼굴이 담겨 있다. 지금은 교인이 200명 남짓이다. 사진만이 그 시간을 증언하고 있다.

이 교회는 6·25전쟁 당시 66명의 교인이 순교한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는 지난해 이 교회를 충청권 기독교 박해지역으로 지정했고 54명의 희생 사실을 공식 집계했다. 이 가운데 여성이 30명이었고, 19세 미만은 절반 이상이었다. 교회학교 학생도 16명이나 포함됐다. 이름조차 남기지 못한 갓난아이 9명은 명단에서 빠졌다.

“예수 믿으면 죽인다는데도 끝까지 신앙을 지켰습니다.” 이성영 목사는 탐방단을 순교기념관으로 안내하며 속삭이듯 말했다. 기념관 내부에는 66명 명패가 빼곡히 전시돼 있었다. ‘무명유아 성도 1950년생~1950. 9. 28’이라고 적힌 것도 보였다. 이름조차 기록되지 못한 아이. 이름 없는 죽음 앞에서 탐방단은 한참을 서 있었다. 기억하지 않으면 잊히는 것이 이름이다. 교회는 그들을 끝까지 성도로 불렀다.

이 비극이 용서로 이어졌다는 점은 더 놀라운 사실이다. 좌익이 떠난 뒤 마을에 남은 그들의 가족을 돌본 이들이 바로 피해자들이었다. 김주옥 집사(후일 장로)는 교인들을 죽인 자들의 자녀를 외면하지 않았다. 원조 물자를 나누고, 진학과 취업에 불이익을 받을 땐 보증을 섰다. 이 목사는 “복수 대신 사랑으로 응답했다”고 전했다. 신앙은 말이 아닌 삶이었다.

공주로 향한 탐방단은 프랭크 윌리엄스 선교사가 1906년 세운 영명학교를 찾았다. 3·1운동 당시 이곳은 만세운동을 준비한 거점이었다. 선교사는 아들에게 ‘우광복’이라는 한국 이름을 지어줬다. 서만철 한국선교유적연구회장은 “일제의 압박을 피해 복 복(福)자를 썼지만, 그 뜻은 분명히 해방을 의미하는 ‘광복(光復)’이었다”고 설명했다.

우광복은 미국으로 돌아가 의사가 됐고 1945년 해방 후 미 해군 군의관으로 다시 한국에 왔다. 존 리드 하지 사령관의 통역을 맡으며 기독교 인사 48명을 미 군정 요인으로 추천했다. 미 군정 초반 기독교가 남한에서 영향력을 얻게 된 데 그의 역할이 컸다. 그는 세상을 떠나며 “공주의 올리브 누이 곁에 묻어 달라”고 유언했고 지금은 공주 선교사 묘역에 여동생과 나란히 잠들어 있다.

공주에서 찾은 또 다른 인물은 앨리스 샤프 선교사이다. 유관순을 수양딸로 삼았고, 명선학당 등 20여개 학교를 세워 충청 지역 여성 교육의 기틀을 닦았다. 그의 제자들은 장관, 경찰서장, 목회자로 자랐다. 복음과 교육, 민족운동은 그렇게 하나의 선으로 이어졌다.

예수 믿기 좋은 시대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너무 쉽게 믿은 만큼 복음의 무게는 가벼워졌다. 순교와 헌신, 그리고 사랑으로 신앙을 증명한 이들 앞에서 돌아본다. 지금 우리는 무엇을 남기고 있는가. 기념비보다 중요한 건 그들의 신앙을 오늘 어떻게 이어가느냐는 것이다. 교회는 지금 그 질문 앞에 서 있다.


글·사진=손동준 기자 sdj@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