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강영애 (7) 교회만 다녀오면 시작된 남편의 폭력… 견디다 못해 가출

입력 2025-04-10 03:03
강영애(뒷줄 오른쪽 첫번째) 목사가 남편의 폭력을 피해 도망쳐 나와 경기도 김포에서 섬기던 교회 부설 유치원에서 둘째 딸(아랫줄 오른쪽 첫번째) 졸업식 날 찍은 기념사진. 강 목사 제공

대청마루에 걸터앉아 예배를 드리던 중 온몸이 떨리는 낯선 경험을 안긴 그곳은 새 교회당이 지어지기 전 임시로 마련된 예배처였다. 나는 약 6개월 동안 그곳에서 예배를 드렸다. 그들이 떠나면서 새로운 교회를 찾기 시작했다.

찾아간 교회마다 낯설고도 이상한 경험은 계속됐다. 예배당에서 그저 조용히 앉아 있기만 해도 목사들이 한결같이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것을 봤습니다”라고 말했다. 아무것도 이해되지 않고 혼란스러운 내게 그런 말들은 더 기름을 붓는 듯했다.

교회에서 그런 낯선 시간을 경험하고 집에 돌아오면 남편은 “어디를 다녀왔느냐”고 다그쳤다. 이화여대 재학 시절 오가며 이 동네를 훤히 알던 나였다. 그러나 남편은 내가 광주에 있다가 올라와 지리를 잘 모른다고 생각했는지, 낯선 길을 혼자 다녔을리 없다며 ‘어떤 놈과 함께 돌아다닌 것이 아닌가’ 의심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가 과분할 만큼 좋은 사람이라 여겼었다. 인품도 훌륭했고 집안도 좋았으며 학력과 능력 외모까지 어느 하나 빠지는 것이 없는 이였다.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없는 그였지만 이상하게도 교회 가는 일에 대해서만큼은 180도 달라졌다.

교회만 다녀오면 폭력이 이어졌다. 매를 맞아 시퍼렇게 멍이 들었다. 누군가 나를 볼까, 혹여 길에서 동창생이나 친구들을 만나 이런 내 모습을 들킬까 두려웠다. 멍든 얼굴로 거리를 다니는 것이 부끄러워 결국 친구들을 만나러 가지 않게 됐다.

마음을 붙일 곳은 오직 교회뿐이었다. 남편의 폭력으로 매 맞은 내 모습을 가족이나 친구에게 보여줄 수 없었다. 하지만 때로는 교회 공동체에조차 멍든 얼굴을 보이기 싫어 한 교회에 오래 머무르지도 못하고 떠돌듯 예배드리곤 했다.

남편도 내가 교회에 나가지 못하도록 자주 이사를 다녔다. 집안에서 한 번도 매 맞은 적 없이 자란 내게 그의 손찌검은 견딜 수 없는 고통이었다. 더는 참을 수 없었던 나는 어느 토요일 늦은 오후 아이 셋을 데리고 무작정 택시에 올라탔다.

어디로 가야 할지조차 몰랐던 나는 기사에게 “그냥 여기서 멀리만 가 달라”고 부탁했다. 손에는 남편이 장롱 안에 두었던 두툼한 누런 봉투 하나만 쥐고 있었다.

얼마나 달렸는지, 그곳이 어딘지도 모른 채 택시에서 내렸다. 눈앞에는 멀리 노을이 지는 강만 보였다. 아직 초등학교도 들어가지 않은 첫째 아들, 연년생인 둘째 딸 그리고 네 살배기 막내딸의 손을 꼭 붙잡고 걸었다.

매 맞은 얼굴을 숨기려 고개를 푹 숙인 채 밭일을 마치고 지나던 아낙네들에게 월세방을 물었다. 반년치 월세를 선불로 주고 단칸방 하나를 겨우 얻었다. 주인집에서 얻은 음식으로 저녁을 때운 아이들은 지친 하루를 이기지 못하고 쓰러지듯 잠들었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들을 남겨둔 채 조용히 밖으로 나왔다.

교회가 있을 법한 곳을 향해 무작정 발걸음을 옮겼다. 칠흑 같은 어둠이 짙게 깔려 어디가 길이고 어디가 밭인지 분간조차 되지 않았다. 그저 걷고 또 걸었다. 울퉁불퉁 튀어나온 얕은 오르막에 걸려 넘어지기도 했지만 다시 일어나 걸었다. 초겨울의 날카로운 추위도 내 발걸음을 멈추지 못했다.

정리=박효진 기자 imher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