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복하지 않는 게 저항의 본질 그 자체가 정의였던 독재 시절
이제 불복은 정쟁의 구실일 뿐 갈등 유발하는 장애물로 전락
‘장미 대선’ 새 정부 출범해도 승복하지 않으면 통합 못 이뤄
이제 불복은 정쟁의 구실일 뿐 갈등 유발하는 장애물로 전락
‘장미 대선’ 새 정부 출범해도 승복하지 않으면 통합 못 이뤄
윤석열 전 대통령 파면에 따른 조기 대선 날짜가 오는 6월 3일로 확정됐다. 다음달이면 후보자 등록이 마감되고 공식 선거운동이 시작된다. 벌써부터 여야 잠룡들의 출마선언이 쏟아진다. 가뜩이나 혼란스러운 대한민국은 더욱 소용돌이칠 것이다. 정치권이 권력을 향해 사생결단하고 내달리는데 비상계엄 사태가 불러온 심리적 내전 상태가 갑자기 봉합될 리 없기 때문이다. 나라를 절반으로 가른 지금의 극단적 분열은 권력을 향한 여야의 격한 정쟁에서 비롯됐다. 헌법재판소 선고 이후 우려했던 폭동은 없었고, 격렬한 시위도 잦아들었지만 일시적인 진정일 뿐이다. 우리사회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을 좀처럼 떨쳐내지 못하고 있다.
분열과 갈등은 결과를 인정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데서 시작된다. 승복하지 않는 게 저항의 본질이고, 그 자체가 정의였던 시절이 있었다. 정당하게 행사되리라는 신뢰에 근거한 국가 시스템들을 군사독재 정권이 철저히 망가뜨렸기에 그랬다. 법원은 권력의 시녀를 자처했고, 선거는 국민을 속였다. 대한민국을 이끈 한 축이었던 민주화는 무너진 시스템을 바로잡는 과정이었다. 그 결과 1987년 헌법에 기반한 제6공화국이 탄생해 40년 가까운 번영을 누렸다. 잘못을 단죄한 경험 덕분에 12·3 비상계엄 선포를 비롯해 민주주의를 훼손하려는 수많은 시도를 극복할 수 있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부작용이 드러났다. 부당한 불복마저 용인되는 사회, 저항을 정파적 이익을 위해 악용하는 사회가 시작된 것이다. 과거에는 불복이 저항을 상징했지만 지금은 정쟁의 구실로 전락했다. 한때 사회를 앞으로 나아가게 한 동력이었는데 이제는 정파적 이익에 매몰돼 사회 발전을 가로막는 장애물일 뿐이다. 당장 윤 전 대통령은 헌재의 결정을 승복하지 않고 있다. ‘청계광장을 가득 메운 여러분의 첫 함성을 기억한다’는 그의 입장문에는 강성 지지층을 결집하겠다는 정치적 셈법만 가득하다. 동시에 헌재의 야당에 대한 질타는 ‘대선 불복’이라는 말을 새삼 떠오르게 한다. 야당은 지난 3년간 무차별 탄핵소추와 입법 폭주를 멈추지 않았다. 헌재가 결정문에 ‘국회 권한 행사가 국정 마비를 초래했다는 윤 대통령의 판단을 존중한다’고 적시했을 정도다. 윤 전 대통령이 총선 결과를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처럼 야당도 대선 결과에 끝내 승복하지 않았다.
미국에는 선거에서 패한 후보가 결과를 인정하는 승복 선언이라는 전통이 있다. 헌법이나 선거법 어디에도 패자에게 승복 선언을 하라는 규정은 없다. 그러나 1896년 대선에서 패한 윌리엄 브라이언이 25대 대통령 윌리엄 매킨리에게 축하 전보를 보낸 뒤 이는 법을 초월하는 불문율이 됐다. 당시 브라이언이 전보에 적은 ‘우리는 (결정을) 미국 국민에게 맡겼고, 국민들의 의지가 바로 법’이라는 문구는 승복의 의미를 명쾌하게 설명한다. 권력교체는 절차와 규정에 대한 해석에 따라 정반대 결론이 나오는 위험한 과정이다. 평소에는 문제가 없다가도 사회가 분열하면 위험성이 극도로 증폭된다. 그렇기에 승복의 본질은 이것저것 따지지 말고 국민의 뜻이 확인되는 순간 곧바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에 있다.
평범한 전보 한 통이 전통으로 자리잡기까지는 역사적 배경이 있다. 당시 미국인은 1860년 불복의 결과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해 대선에서 노예제 폐지를 앞세운 공화당은 에이브러햄 링컨을, 민주당은 당내 온건파인 스티븐 더글러스를 후보로 세웠다. 그런데 민주당 강경파들이 경선에 불복해 새로운 당을 만들어 독자후보를 냈다. 결과는 당연히 분열된 민주당의 패배였다. 더글러스는 링컨이 임기를 시작하기도 전에 남부의 주들을 돌며 “우리의 대통령은 링컨”이라고 외쳤지만 불복한 남부는 속속 연방에서 탈퇴했고, 75만명이 희생된 남북전쟁으로 이어졌다. 미국인들이 브라이언의 축전을 평화로운 권력 이양을 위해 헌신하겠다는 신호로 해석하고 환호한 데는 이런 이유가 있었다.
‘장미 대선’이 끝나면 우리사회의 갈등과 분열은 치유될 수 있을까. 지금같은 정치 풍토가 바뀌지 않는다면 어려울 것이다. 선거 다음날부터 그 다음 선거를 위한 전쟁이 시작될 테니까. 하지만 더 이상의 불복은 없어야 한다. 말로 승복한다고 해놓고 행동은 다른 거짓 승복도 사라져야 한다. 내전으로 잘못된 정치를 바로잡는다면 역사가 너무 가혹하지 않은가.
고승욱 수석논설위원 swk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