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장이 찬송가와 아멘 소리로 넘쳐 난다. 기독교적 이상을 현실정치에 구현해야 한다는 주장들, 신앙으로 나라를 구해야 한다는 목소리들이 쟁쟁하다. 본래 광장의 신앙은 진보적 기독교의 전유물이었다. 진보적 기독교가 ‘광장’으로 나가야 한다고 외칠 때 보수적 신앙인들은 ‘골방’을 고집했다. 신앙은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관계이며, 섣부른 정치참여는 기독교의 순수성을 훼손할 것이라고 했다. 나라가 어려울수록 골방에 들어가 묵상하고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던 이들이 광장을 점유하고 디트리히 본회퍼를 외치는 상황에 많은 이들이 혼란스러워하고 있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진보적 정치참여의 신학을 되돌아봐야 한다. 한국의 정치참여 신학은 크게 두 배경 아래에서 형성됐다. 첫째는 기독교국가인 크리스텐덤의 신학이다. 기독교가 사회의 주류일 때, 그때가 성경의 정신으로 세상을 지도할 수 있다고 생각하던 때였다. 우리에게 익숙한 서구 신학자 대다수는 그 세계 안에 살던 사람들이었다. 둘째는 한국 민주화운동의 역사다. 엄혹한 독재 시절, 모두가 숨죽일 때 교회가 광장에서 정의를 외쳤고 많은 희생을 치러 내면서 민주화에 큰 공헌을 했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서구에서도 크리스텐덤의 미몽에서 깨어나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한국은 본래부터 기독교 국가가 아니었다. 또한 지금은 정치적 목소리를 내는 데 대단한 용기가 필요한 시기도 아니다. 저마다 쏟아내는 정치적 주장이 소음이 돼 있는 때다. 교회가 바른말을 해도 숱한 소음 중에 하나로 묻혀 버릴 수 있다.
여기서 교회는 길을 잃어버렸다. 보수도 그렇고 진보도 마찬가지다. 보수는 그 순수한 열정에도 불구하고 골방에 있다가 준비도 없이 광장으로 나와 길을 잃었다. 진보는 광장의 폐해를 절감하지만 다시 골방으로 돌아가는 것이 답이 아님을 알고 있기에 안절부절못하고 있다.
길은 어디에 있을까.
광장과 골방 사이에 공동체가 있다. 교회는 단순히 개인 경건을 추구하는 이들이 모인 여러 골방의 산술적 합산이 아니다. 예수님은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 함께하겠다”고 하셨고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구하면 이뤄주겠다”고 약속하셨다. 두 사람이 마음을 함께하는 기도는‘1+1’ 이상의 의미가 있다. 인간은 본래 자기중심적 존재이기 때문에 기도도 자기중심적일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마음을 모아 함께하는 기도에서 비로소 ‘나를 넘어서는 신앙’의 가능성이 열린다.
초대교회 교인들은 그들의 예배 공동체를 ‘에클레시아’라고 불렀다. 고대 그리스 폴리스의 ‘민회(民會)’를 뜻하는 정치적 용어다. 자유로운 시민이 저마다 주체가 돼 함께 공동체를 이끌어 가는 이상과 참으로 인간다운 삶을 실현해 보자는 꿈이 담겨 있는 단어다. 그러나 오랜 전쟁과 독재, 헬라와 로마제국을 지나면서 좌절된 이상이 됐다. 초대교인들이 그들의 작은 공동체를 이 이름으로 부르면서 그 꿈을 다시 점화하기 시작했다. 서로 사랑하며 섬기는 작은 모임을 통해 누구나 꿈꿔 오던, 그러나 구현할 방법을 알지 못했던 공동체가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그 공동체의 매력이 로마제국의 곳곳에 전파됐고 이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초대교회의 역사다.
대다수 사람이 고등교육을 받았고 많은 정보로의 접근도 쉬워진 시대에 왜 사람들이 극단적인 포퓰리즘에 휘둘릴까. 사람들이 외로움을 느끼기 때문이다. 다수 학자의 분석이 이 지점에 모인다. 사회적으로 고립돼 있고 어디에서도 자신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고 느끼는 이들일수록 정치적 극단주의에 쉽게 끌린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교회가 우선 해야 할 일은 사람들을 환대하고 서로를 연결해 주는 따뜻한 공동체가 되는 일이 아닐까. 그 공동체는 골방의 묵상이 자기중심으로 흐르지 않도록 방향을 부여할 것이며 깨어 있는 시민으로 공적인 삶을 살아갈 준비를 시켜줄 것이다. 광장의 소음과 골방의 고립 사이, 따스한 공동체가 있어야 한다. 하나님 나라의 아름다움을 말이 아닌 삶으로 보여주는 공동체 말이다. (포항제일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