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임시정부는 기독교 영성 기초 위에 세운 민주공화국

입력 2025-04-10 03:06
충남 천안 독립기념관에 실물 크기로 복원된 상하이 임시정부 청사 회의실.국민일보DB

한국교회 140년 역사 가운데 가장 자랑스러운 일을 꼽으라면 많은 이들이 3·1운동에서의 주도적 역할을 들 것이다. 선교사 입국 이후 30여년밖에 지나지 않았고 기독교 인구도 전체의 1.5%에 불과했지만, 교회는 안으로는 봉건제에 저항하고 밖으로는 제국주의의 거센 물결을 온몸으로 막아내며 대한민국의 초석을 놓는 데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다.

3·1운동 거사 40일 후 중국 상하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됐다. 이때도 기독교인의 기여는 절대적이었다. 주로 기독교인들로 구성된 ‘신한청년당’이 임시정부의 모체가 됐고 ‘독립 임시사무소’를 설치해 활동을 시작했다. 상하이 한인교회 성도들의 헌금은 임시정부 운영자금으로 사용됐다. 임시정부를 세운 안창호 이승만 김구 김규식 이동휘 선생 등은 널리 알려진 기독교인이었으며, 임시헌장을 기초한 조소앙 선생도 세례받은 그리스도인으로 알려져 있다. 대한민국 헌법이 밝히는 바와 같이 임시정부는 현재 대한민국 법통의 출발점이다.

1919년 중국 상하이에서 설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이끌었던 지도자들의 모습. 왼쪽부터 안창호 김구 이승만 김규식 이동휘 조소앙 선생. 국민일보DB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특징 가운데 두 가지를 주목해보자. 첫째, 임시정부는 민주공화제를 택했다. 조선 왕조가 500년간 지속했고 대한제국의 왕족과 귀족들도 여전히 존재했지만, 임시정부는 왕정이 아닌 공화정을 택했다. 1919년 당시 전 세계에서 민주공화제를 채택한 나라는 미국 프랑스 스위스 등 극소수에 불과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는 결코 쉬운 결정이 아니었을 것이다.

임시정부 지도자들은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조선의 왕들이 정치를 잘못해 백성을 도탄에 빠뜨리고 결국 나라를 일본에 넘겼다. 나라가 망한 뒤에도 왕족은 일제로부터 작위와 특혜를 받아 잘살고 있다. 민중은 목숨을 걸고 3·1운동을 일으켰는데 그토록 어렵게 되찾은 나라를 다시 왕실에 돌려주는 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다. 3·1운동이 단순한 독립운동이 아니라 ‘독립혁명’이라 불리어 마땅한 이유다.

둘째로 주목할 점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중심에 기독교적 영성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임시정부의 헌법이라 할 수 있는 ‘대한민국 임시헌장’의 전문(前文)을 현대어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 “하나님과 사람이 하나 돼 국내외가 힘을 모아 서울에서 거사를 일으킨 지 30여 일에.” 즉 3·1운동은 단순한 민중의 분노가 아니라 하나님과 사람의 일치 속에서 일어난 운동으로 선언된 것이다. 또 헌장의 ‘선서문’에서는 “우리가 흘리는 한 방울 피가… 신(神)의 나라 건설의 귀한 기초가 되리라”고 하며 제7조에는 “대한민국은 신(神)의 의사에 의하여 건국한 정신을 세계에 발휘한다”라고 명시하고 있다. 임시정부 지도자들은 대한민국이 단순한 정치체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따라 세워진 국가였음을 확신했다.

흥미로운 점은 임시정부 헌장이 밝히는 민주공화국과 기독교 영성이 서로 연결돼 있다는 것이다. 헌장은 모든 국민이 남녀와 신분의 차별 없이 자유롭고 평등함을 선언한다. 이는 기독교의 인간관, 즉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존엄한 존재라는 믿음에 뿌리를 두고 있다.

기독교 영성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개인이 전체 공동체의 일부임을 깨닫고 공동체를 위해 자신을 헌신할 힘을 가진다. 1907년 평양 대부흥 운동을 경험한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하나님과의 강력한 만남을 통해 신적 소명을 받았고 자발적인 희생을 결단했다. 기독교적 영성에 뿌리내린 자유롭고 평등한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의 탄생이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민주공화국의 형태를 채택했을 뿐 아니라, 그 기초에 깊은 영성이 있었다.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민주공화국의 중심에도 기독교 영성이 자리 잡고 있어야 한다. 영성 없는 민주공화국은 뿌리 잘린 식물과 같다.

영성이 없는 법치는 양심과 관용을 상실한 채 형식적 법 기술의 횡포만 남게 된다. 영성을 잃은 정치인은 공공의 선을 추구하기보다 오직 당선만을 목표로 삼고 당선된 사람은 다음 당선을 목표로 삼는다. 영성이 사라진 보수주의는 가치를 지키기보다 기득권을 지키며, 자기반성적 영성 없는 진보는 도덕적 우월감에 사로잡혀 타인을 가르치려 하다가 반감과 분노를 불러일으킨다.

‘아, 민주공화국에 영성의 자양분을 공급하던 교회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역사의 어느 지점에서 한국 기독교는 참된 영성을 잃고 기독교 종족주의(tribalism)로 퇴화하고 말았다. 십자군의 방식으로 ‘신(神)의 나라’를 건설하려 하는데 이는 불가능한 망상으로 밝혀졌다. 교회 밖에 가짜 적을 설정하고 그 적과 싸우는데 권력과 폭력을 동원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진짜 ‘신의 나라’는 가난하고 겸손한 이들에게 임해 있는데 말이다.

교회는 더 이상 우리 선조들의 영성과 호흡하기보다 그들이 남긴 업적만을 기념하며 신앙을 박제된 유산으로 전락시켰다. 자기를 희생해 공동체를 살리는 길을 버리고 오히려 자기 확장에만 몰두하면서 공공성을 훼손한다. 영성을 잃은 한국교회의 미래에, 그리고 교회의 자양분을 받지 못해 쇠약해진 한국 민주주의 미래에 암울한 기운이 드리워져 있다.

장동민 백석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