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正義)의 반대편에 서 있는 개념은 무엇일까. 불의나 죄악이 얼른 떠오르지만, 유럽 역사가 말해주는 답은 오만과 과신이다. 고대 그리스 ‘최초의 시인’ 헤시오도스가 ‘일과 나날’에서 “디케(정의의 여신)에 귀 기울이고, 히브리스(오만의 여신)를 피하라”고 말했다. 신성로마제국 황제 페르디난트 1세의 통치 원칙은 “정의를 행하여 오만함이 망하게 하라”로 알려져 있다. 히브리스는 훗날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에 의해 역사해석학 용어로 굳어졌다. “성공에 취해 남의 말을 듣지 않고, 판단력을 잃은 채 일방적으로 행동하는 것”을 가리킨다.
헌법재판소의 윤석열 전 대통령 탄핵심판 결정은 결국 국가 최고권력자의 오만과 과신을 경고하는 내용이다. 군데군데 대통령이 일방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한 사실을 들고 그 잘못을 저울에 달아 정의를 추구했다. 헌재는 국무회의의 존재 목적을 대통령의 ‘독선’을 방지하는 것이라 규정했다. 대통령에게 ‘주관적 확신’이 있다 해서 비상계엄 선포가 정당화되지 않는다고도 헌재는 말했다. 그렇게 오만과 과신을 걷어낸 비상계엄은 자의적이고 비합리적인 결단으로만 남아 있을 뿐이다.
스스로 “국민이 키운 윤석열”이라 말했듯 윤 전 대통령도 한때 기대를 많이 받았다. 하지만 이내 그가 여간해선 고집을 꺾지 않는다거나 듣기 싫은 말에 크게 화를 낸다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공정과 상식을 강변해주던 검찰 후배들이 조금씩 고개를 저었다. 쓴소리하던 참모들은 대통령실을 떠났고, 남은 이들은 부족한 해명으로 사태를 막았다. 참모들은 격노와 과신이 문턱을 넘지 않게 애썼으나 없애진 못한 듯하다. 지난해 12월 3일 이후엔 누구도 ‘대통령이 실제 자주 격노하느냐’ 더 묻지 않는다.
헌재를 향한 찬사도 비난도 자유겠지만 신념을 갖기 전에 교훈이 뭔지는 알아야 한다. 문형배 헌재소장 권한대행은 파면 주문 직전 청구인석과 피청구인석을 번갈아 바라보며 정치를 회복할 것부터 선고했다. “피청구인 내지 정부와 국회 사이의 대립은 일방의 책임에 속한다고 보기는 어려우며….” 애초 대통령과 국회가 갈등하고 있으면, 그것이 정치이므로 정치인 누구든 나서서 해결점을 찾아야 했다. 정작 한 일은 상대를 비난하다가, 서로의 권한을 극한으로 끌어올려 증오하고, 마침내 정치력 상실의 운명을 사법에 맡기는 것이었다.
디케가 일을 마쳤지만 탄핵 터널의 끝은 어쩐지 아직 어둡다. 대선에서 승리한 뒤 개헌으로 헌재를 없애자는 엄포가 여전하다. 헌재가 윤 전 대통령의 국정마비 판단에 대해 “정치적으로 존중돼야 한다”고 적은 부분, 계엄 대신 “정당의 해산을 제소할 것인지를 검토할 수 있었다”고 쓴 부분도 또 다른 갈등이 되고 있다. ‘승복’이 모든 비판을 불허한다는 의미야 아니겠으나, 이젠 잠시 멈출 때가 아닌가 싶다. 헌재가 박근혜 전 대통령을 파면하기 직전 일부러 추가한 말이 ‘화합과 치유’였다. 정치가 이 말뜻을 몰라 8년 만에 비극을 되풀이한 건 아닐 것이다.
헤시오도스가 기원전에 알았듯 정의의 여신이 요청되는 시간은 오만과 과신이 득세할 때다. 헌재 결정문이 아름답다면 그만큼 현실은 너저분하다는 뜻이다. 오늘날 세상이 화합 대신 분열인 이유는 각자의 신념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과도해서다. 정의를 세게 외치는 이들일수록 차이를 못 견디고, 겸허하지 않고, 나아가지 못한다. 총을 들게 한 대통령은 바로 그 이유로 사저에 돌아가지만, 8대 0을 교통사고 과실 비율처럼 안다면 절반의 교훈에 머물 뿐이다. 내전 같은 대선에선 오만과 과신이 얼마나 나타날까. 이것들을 망하게 해야 정의가 찾아온다.
이경원 정치부 차장 neosar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