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부채에 바람과 달 실어… 아끼는 벗과 나누리라

입력 2025-04-08 23:14
서울 성북구 간송미술관이 반세기만에 소장 부채 그림을 선보이는 ‘선우풍월’전을 한다. 대중에게 친숙한 조선 후기 추사 김정희, 단원 김홍도, 우봉 조희룡을 비롯해 오세창, 안중식, 조석진 등 근대 서화 거장의 작품을 만날 수 있다. 사진은 김홍도의 ‘기려원류’로 그림에는 김홍도의 관서(글과 낙관), 스 승 강세황이 쓴 글이 있다. 간송미술관 제공

중인 출신 서화가 우봉 조희룡이 부채에 그린 난초 ‘난생유분(난이 돋아나니 향기가 있다)’은 붓글씨 쓰듯 툭툭 그은 난에서 서예의 맛이 난다. 난초는 그리는 게 아니라 서예처럼 쓰는 것이라 했던 양반 출신 스승 추사 김정희의 가르침을 받은 것이다. 그랬던 조희룡이 1851년 신안 임자도에 유배를 간 이후 그린 난초 그림 ‘분분청란(향기로운 푸른난)’에는 난이 잡초처럼 무성하다. 아마도 유배지에서 느낀 울분에 과거의 형식을 버렸을 것 같다. 그런데 이 그림 반대편에는 스승 김정희가 물기를 없애 바싹 마른 붓으로 영지버섯과 난초를 서예하듯 그린 ‘지란병분(영지와 난초가 향기를 함께 하다)’이 걸려 있다. 아꼈던 제자 조희룡의 작품 세계 변절을 꾸짖는 것처럼 말이다.

서울 성북구 간송미술관이 성질이 급했나. 이제 막 봄꽃이 다퉈 피기 시작하는데 벌써 부채 그림을 내놨다. 여름을 앞두고 마련한 부채 그림 특별전이다. 제목은 ‘선우풍월: 부채, 바람과 달을 함께 나누는 벗’이다. 선면(扇面·부채) 그림 전시는 일부를 선보였던 1977년 이후 48년만이다. 반세기 만에 갖는 이번 부채 전시에는 18세기를 호령했던 단원 김홍도부터 20세기 초 3대 스타 서화가 안중식, 조석진, 김규진, 그리고 서화 감식가 오세창, 20세기에 신문 삽화를 그렸던 관재 이도영의 작품까지 부채 그림 소장품 133점 중 55점이 나왔다. 김홍도, 김정희의 부채 그림 등 최초 공개하는 것만 23점이 된다.

부채 그림 문화는 고려 때부터 내려왔다. 김영욱 전시교육팀장은 “18세기 후반부터 특히 활발했다. 문인들끼리 선물로 주고받는 등 신분 과시의 역할을 했던 거 같다”고 말했다. 부채의 실용성에 글씨와 그림으로 예술성을 입히다보니 조희룡의 사례가 보여주듯 그 자체로서 조선시대 회화사를 보여준다. 특히 산수화, 사군자, 화조화 등 회화의 중요 장르가 부채 그림에서도 선호되는 소재라 작가별, 시대별 회화 경향을 읽을 수 있다.

김홍도가 46세에 완숙한 필치로 접이식 부채에 말 타고 놀러가는 선비를 그린 ‘기려원류’의 완성도는 유명한 ‘마상청앵도’에 못지않다. 이 부채그림에는 스승 강세황이 작품 내력을 쓴 글과 당대 명필 경산 이한진의 쓴 시가 곁들여져 김홍도의 교유 관계를 짐작하게 한다. 글씨만 있는 부채도 있다. 철농 이기우, 성재 김태석 등 20세기 서예가의 글씨 부채는 서체를 감상하는 기쁨을 준다.

전시는 두 축이다. 1층 근대 선면서화는 1910년대부터 1930년대까지 우리나라 최초의 미술교육기관인 서화 미술회, 이곳이 주축이 돼 만든 최초의 미술단체 서화협회 소속 서화가들의 작품을 중심으로 꾸며졌다. 또 1930년대부터 1960년대까지 간송 전형필이 서예가 성재 김태석, 철농 이기우 등으로부터 선물받은 부채 그림 작품도 포함됐다.

2층에는 김홍도, 김정희를 필두로 조선 후기 서화가의 부채가 나왔다. 김정희가 키운 제자들뿐 아니라 김정희가 매개가 된 청나라 서화가의 부채 그림도 볼 수 있다. 김정희는 중국 사행을 간 것을 계기로 청나라 지식인과 교류하며 이들의 문화를 수입하는 역할을 했다. 청나라 섭지선이 정조의 부마이자 당대 대표 수장가인 해거재 홍현주에게 선물한 ‘청죽’ 역시 볼거리다. 청나라 여인들이 부채를 통해 시쓰는 문화를 공유했던 규방 문화를 보여주는 작품도 있다.

일제강점기 사재를 털어 미술품을 수집했던 간송 전형필이 1938년에 세운 ‘보화각’에서 하는 전시라 운치가 있다. 간송 컬렉션에 포함된 근대기 부채 그림에는 ‘이형(李灐)’이라는 인물이 찍은 인장이 유독 많다. 그래서 이형의 수집품을 훗날 간송이 일괄 인수한 것으로 추정된다. 5월 25일까지.

손영옥 미술전문기자 yosoh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