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현대미술 거장 피에르 위그(63)는 2017년 독일 뮌스터조각프로젝트에서 폐기된 아이스링크장의 땅을 파헤쳐 고대 유적 혹은 낯선 행성을 상상하게 하는 기상천외한 설치 작품을 선보여 화제가 됐다.
피에르 위그가 한국에 상륙했다. 서울 용산구 리움미술관에서 하는 개인전 ‘리미널(Liminal)’을 통해서다. 아시아 첫 개인전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는 2019년 일본 오카야마에서 개최된 트리엔날레 ‘오카야마 아트서밋’ 예술감독을 맡는 등 기획자로서 아시아에 진출한 바 있다.
한국의 미술애호가에게는 2016년 미디어시티서울 비엔날레에 초대된 영상 작품 ‘휴먼 마스크’로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일본에서는 원숭이를 식당 서비스에 동원하는 마케팅이 있다. 동일본 대지진으로 인간만 피신하는 바람에 식당에 혼자 남겨진 원숭이가 있었다. 위그는 그 원숭이 얼굴에 여성의 마스크를 씌워 찍은 영상을 보여줌으로써 인간중심주의를 돌아보게 했다.
이번 리움 개인전 전시장에 들어서면 거대한 어둠과 마주하게 된다. 넘어질까 조심스레 걷다 처음 만나는 작품은 바닥에 바가지를 엎어 놓은 듯 작고 둥그런 현무암. 만삭 여성의 배를 캐스팅했다고 한다.
영상 ‘리미널’에는 검은 타원형으로 얼굴이 가려진, 애초부터 얼굴이 없는 거 같은 미완성의 인간이 등장한다. 전시 제목으로도 사용된 리미널은 “생각지도 못한 무언가가 출현할 수 있는 과도기적 상태, 진화의 가능성을 제시한다”고 김성원 부관장은 말했다. 함께 설치된 세 개의 수족관 작품 ‘주기적 딜레마’ ‘주드람’ ‘캄브리아기 대폭발’ 또한 진화 중인 세계를 상징한다. 예컨대 ‘주기적 딜레마’에는 멕시코의 동굴에서 발견된 ‘장님 물고기’가 들어있다. 어둠 속에서 수천 년 살다보니 시력이 퇴화한 이 물고기를 일반적인 시력을 가진 물고기와 함께 수족관에 살도록 한 설치 작품이다. 이 작품은 두 물고기에 밝아지고 어두워지기를 반복하는 새로운 환경을 제시함으로써 진화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간 1층 전시장에서는 마지막으로 만나는 대형 영상 ‘카마타’가 압권이다. 칠레 아타카마 사막에서 우연히 발견된 인간의 유해를 대상으로 장례 의식을 치러주는 영상이다. 그런데 장례를 치르는 주체는 사람이 아니라 기계다. 수평선 너머 해가 뜨는 경이의 세계에서 기계가 천천히 고귀한 의식을 수행하는 장면을 보다보면 기계는 차갑고 심장이 없다는 고정관념이 무너진다. 해 뜨는 장면은 새로운 시작을 암시한다. 그래서 이 죽음 의식은 전시장 처음에서 만나는 태아를 품은 만삭의 몸 현무암 조각과 대구를 이루는 것 같다. 미디어시티서울에서 본 추억의 영상 작품 ‘휴먼 마스크’도 만날 수 있다.
정리하면 인간은 검은 마스크로 얼굴이 삭제됐고, 거꾸로 동물은 인간의 얼굴 마스크를 쓰고 있고, 인간 세계에서 버려진 해골을 기계가 애도하며 장례를 치러준다. 코로나 이후 미술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주제는 포스트휴먼이다. 위그도 자신만의 방식으로 인간과 비인간의 공존을 이야기한다. 7월 6일까지.
손영옥 미술전문기자 yosoh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