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온의 소리] 빨간 채색옷을 입은 소녀

입력 2025-04-08 03:04

독일이 패망했을 때 살아남았던 유대인 중에 오스카 쉰들러가 구해낸 사람만 무려 1100명이나 됐다. 그렇게 살아남은 유대인들이 고마움의 표시로 금이빨을 녹여 만든 반지를 건네줄 때였다. 쉰들러는 유대인들의 감사 표현에 오히려 통곡한다. 자신의 승용차를 보면서 이 차를 팔았으면 열 명은 더 구했고 자신의 금배지를 만지면서 이 배지를 팔았으면 최소한 한 명을 더 살렸을 텐데 그렇게 못했다고 자책한다. 영화 ‘쉰들러 리스트’(스티븐 스필버그 감독·1993)의 내용이다.

쉰들러의 이런 행동과 고백은 의아하지 않을 수 없다. 원래 오스카 쉰들러는 죽음 앞에 있는 유대인의 노동력을 공짜로 이용해 사업을 했다. 그 이익 일부를 수용소 소장에게 뇌물로 주는 방식으로 부를 축적하던 속물 사업가였다. 그런데 자신의 재산을 모두 사용하면서 유대인들을 구했을 뿐만 아니라 마지막까지 자신의 행위가 부족하다고 말하는 사람으로 변화됐다. 속물 사업가의 이러한 변화는 무엇 때문일까.

영화는 무려 3시간15분 길이인데 스티븐 스필버그는 시작 부분의 유월절 식사 장면과 쉰들러로 인해 살아난 유대인들이 가족들과 함께 쉰들러 묘지를 참배하는 장면만 색채를 사용했고 나머지 전부를 흑백으로 촬영했다. 그런데 영화 중반 부분쯤 주의할 장면이 나온다. 나치 독일의 인종 청소 계획에 따라 유대인 학살 장면이 펼쳐지는 중 갑자기 빨간 채색옷을 입은 어린 소녀가 삽입돼 나타난 것이다. 의도적으로 필름마다 수작업으로 그 소녀의 옷에 빨간색을 칠한 것이다.

영화 기법 중 흑백이거나 TV 속에 있는 장면은 과거 혹은 이미 사라진 것, 나와 관계없는 것을 표현할 때 주로 쓴다. 반면에 색채는 살아있는 것 혹은 현재를 묘사할 때 쓴다. 그런 점에서 스티븐 스필버그가 흑백을 사용한 것은 과거의 것, 생명이 없는 것이다. 지금 나와 상관없는 것으로 표현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죽음의 행렬에 있는 한 소녀의 옷에만 빨간색을 칠했다.

언덕 위에서 수용소 안의 이 장면을 바라보는 쉰들러의 눈에 그 소녀가 들어온다. 그리고 나치가 학살을 감추기 위해 시신을 소각하는 장면에서도 수레에 실려 나오는 시신 중에 빨간 채색옷을 입은 소녀가 쉰들러의 눈에 들어온다. 놀랍게도 이 장면이 쉰들러의 유대인 구출의 시작점이 된다. 흑백이 아니라 빨간 채색옷을 입은 소녀에게서 생명을 본 것이다. 쉰들러가 변할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오늘 우리의 문제는 보지 못하는 것에 있다. 우리가 TV를 통해 세상 소식을 듣는 것 역시 흑백 영화를 보는 것과 다르지 않다. 우리는 세상의 고통을 보지만 흑백영화나 TV 속의 장면을 보는 것처럼 자신과 상관없는 것으로 간주한다. 세월호 때도 그랬다. 산불로 고통당하는 이들을 보면서도 미얀마의 지진으로 아이를 잃은 어머니의 눈물을 보면서도 우리는 태연하게 산다. 그 아픔과 고통 앞에 교회마저도 크리스천마저도 태연한 것 같아서 걱정이다. 어쩌면 그 정도가 아니라 세상의 고통을 흑백 안경 같은 번영신학의 필터로 걸러내고 부와 세속적 성공을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도식화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될 때 가난과 재난을 하나님의 형벌처럼 해석하는 지경에 이른다. 세상의 고난을 짊어지신 주님과 다르게 세상을 보는 것이다. 세상과 관계없는 교회가 된 이유이다.

왜 하나님은 말세에 성령을 보내신다고 약속하셨을까. 당연하다. 보여주기 위해서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행 2:17) 이처럼 성령 때문에 예수를 믿는 자들은 다른 시각을 갖게 된다. 바로 예수의 시선이다. 예수의 시선으로 세상의 고통을 보는 교회와 크리스천이기에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이 힘들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이 이뤄지도록 세상의 변혁을 추구하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 우리 교회의 모습은 흑백영화를 보는 것처럼, TV를 보는 것처럼 세상과 사람을 보는 것 같다. 고통의 세상을 걷고 있는 빨간 채색옷을 입은 소녀를 볼 수 있어야 하는데 말이다.

하정완 목사(꿈이있는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