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은 한국 선교 시작된 달… 서상륜·이수정·윤치호 세례 받아

입력 2025-04-08 03:13
호러스 G 언더우드와 헨리 G 아펜젤러 선교사는 140년 전인 1885년 4월 5일 제물포에 도착해 공식적인 한국 선교를 개시했다. 1885년 4월 10일 개원한 한국 최초의 서양식 병원인 광혜원 모습. 국민일보DB

한국교회 140년 역사에서 4월은 역사적인 달이다. 한국 선교의 공식적인 시초가 된 언더우드, 아펜젤러 선교사가 제물포에 도착했고 주요 인물들이 세례를 받았다. 3·1운동 여파로 교회와 신자들이 핍박을 당했다. 교단과 기독교 대학, 신학교들도 속속 설립됐다. 소래교회를 설립한 서상륜이 1882년 4월 로스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았다. 조선의 마게도니아인으로 불렸던 이수정, 개화사상가 윤치호도 세례를 받았다. 중앙신학교와 성공회신학교가 개교했으며 조선신학교가 한국신학대학으로 개칭했다.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가 창립됐으며 신사참배 거부로 폐교된 숭실대가 서울에 재건했다.

1919년 4월 1일 충남 병천에서 기독교인 학살 사건이 발생했다. 14일엔 수원 수촌교회 방화사건 발생했으며 15일 제암리교회 학살 사건이 일어났다. 일본군은 사람들을 교회당에 가둔 채 불을 지르고 총을 쏘는 등 만행을 저질렀다.

1887년 4월 3일 개화사상가 윤치호가 중국 상하이에서 세례를 받았다. 윤치호는 1884년 7월 고종의 선교사업 윤허가 내려질 때 통역으로 참여했다. 그는 갑신정변 이후 상하이에 유학하던 중 남감리회 선교부가 운영하던 중서서원에 재학하다 세례를 받고 기독교인이 됐다. 1888년 미국으로 건너간 그는 밴더빌트대학과 에모리대학에서 공부하면서 여러 곳에 강연을 다니며 한국 선교를 요청했다. 에모리대 캔들러 총장에게 선교기금으로 200달러를 기탁하는 등 남감리회의 한국 선교를 촉구했다.

1885년 4월 5일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 호러스 G 언더우드와 미감리회 선교사 헨리 G 아펜젤러 부부가 제물포에 도착했다. 각각 26세, 27세 나이였다. 국내 정세 불안으로 언더우드만 서울로 향했고 아펜젤러 부부는 다시 일본으로 돌아갔다가 6월 20일 내한했다. 아펜젤러는 제물포 도착 즉시 본국에 보고하면서 소감을 밝혔다. “우리는 부활주일에 여기 왔습니다. 이날에 죽음의 권세를 이기신 주님께서 이 백성을 얽매고 있는 결박을 끊으시고 그들도 하나님의 자녀들이 얻는 빛과 자유를 누리게 하소서!”

1890년 4월 5일 호주 빅토리아장로교회 파송 선교사 조지프 H 데이비스가 서울을 출발해 부산에 도착했으나 여행 중 병을 얻어 사망했다. 그는 6개월 전인 1889년 10월 여동생 메리 데이비스와 내한했다. 5개월간 서울 언더우드 집에 머물며 한국 선교를 준비하던 데이비스는 부산과 경남 지역을 개척하기로 하고 1890년 3월 부산으로 향했다. 하지만 열악한 환경으로 천연두에 걸렸고 폐렴까지 겹쳤다. 여행 마지막 5일은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고 한다. 데이비스의 죽음은 호주장로교회의 한국 선교에 대한 관심을 촉발해 이듬해 10월 맥케이 멘지스 포오셋 페리 선교사 등이 파송을 받았다.

지난 2007년 4월 8일 부활주일 새벽, NCCK와 한기총이 주최한 부활절 연합예배가 서울광장에서 진행되고 있다. 국민일보DB

1947년 4월 6일 제1회 부활절연합예배가 서울 남산 조선신궁 터에서 1만5000여명의 신자들이 모인 가운데 개최됐다. 연합예배는 장로교 분열로 1962년부터 두 개로 나뉘었고 1973년 보수 측이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가 주관하는 부활절 연합예배에 함께하기로 하면서 남산 야외음악당에서 연합예배를 드렸다. 90년대에는 부활절연합예배위원회가 상시 조직으로 전환했고 장충체육관 상암월드컵경기장 잠실올림픽주경기장 등에서 연합예배를 개최했다. 2006년에는 NCCK와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의 ‘한국교회 부활절 연합예배’가 탄생해 2007년부터 2010년까지 서울광장에서 개최됐다. 2010년 이후엔 다양한 단체와 교회들이 주도하는 예배로 바뀌었다.

1885년 4월 10일 최초의 서양식 병원인 광혜원이 탄생했다. 미국공사관 소속 의사 자격으로 1884년 내한한 알렌 선교사가 갑신정변 당시 부상 당한 명성황후의 조카이자 수구파 지도자였던 민영익을 치료해준 결과였다. 광혜원이란 이름은 ‘은혜를 널리 베푸는 집’이라는 뜻으로 고종이 직접 지었다. 제중원으로 개명한 뒤엔 선교를 위한 전초기지 역할을 했다. 언더우드가 교사 자격으로 머물며 한국어를 배웠고 스크랜턴 선교사도 의사로 활동했다. 1885년 6월 입국한 헤론이나 이듬해 내한한 여의사 AJ 엘러즈도 이곳에서 활동했다. 제중원은 1894년 에비슨에 의해 선교병원이 되었고 훗날 미국인 실업가 세브란스가 후원한 건축기금으로 새 건물을 마련해 오늘의 세브란스병원으로 발전했다.

1944년 4월 21일 신사참배반대운동으로 투옥된 주기철 목사가 옥중에서 순교했다. 주 목사는 일제로부터 10년형을 선고받아 복역 중이었다. 1936년 평양 산정현교회에 부임한 주 목사는 일사각오(一死覺悟) 신앙으로 일제의 신사참배를 거부했다.

1954년 4월 24일 경북 안동중앙교회에서 열렸던 대한예수교장로회 제39회 총회는 제27회 총회의 신사참배 결의를 취소했다. 신사참배 불참 교역자와 신자, 선교사를 제명한 노회 학교 기관에 그 기록을 취소하기로 가결했다.

1883년 4월 29일 이수정이 일본 도쿄 로게쓰초교회에서 미국 선교사 녹스에게 세례를 받았다. 이수정은 온건개화파 양반 학자로 1882년 수신사 박영효의 비공식 수행원으로 일본에 건너갔다. 선진문물을 시찰하고 연구하는 것은 물론 일본 기독교인 농학자 쓰다센과도 교류했다. 쓰다센을 만난 이수정은 마태복음 산상수훈에서 시작해 기독교에 관한 대화를 나눴고 쓰다센은 한문 신약성경 한 권을 전달했다. 이수정은 이때부터 성경을 탐독하며 기독교를 연구했다. 1882년 12월 도쿄 쓰키지교회 성탄축하예배에 참석해 큰 감명을 받아 이듬해부터 성경을 체계적으로 공부했다.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했고 로게쓰초교회 야스가와 목사로부터 불교와 기독교의 차이점에 대한 의문을 해소한 후 세례를 받기로 결심했다. 세례 문답은 녹스 선교사에 의해 2시간 동안 진행됐다. 그후 이수정은 마가복음 등을 한글로 번역했다.

신상목 기자 smsh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