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사들, 교육·세례 통해 여성 권리 증진… 근대혁명 ‘신호탄’

입력 2025-04-08 03:05
이화학당 초기 학생들의 모습. 이화여대 교목실 제공

1886년은 여성 선교사를 통한 복음 역사가 시작된 해다. 여성 선교의 문은 감리교 선교사였던 메리 스크랜턴이 세운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여성교육기관 ‘이화학당’이 열었다.

19세기 말 조선의 여성은 종일 집안일에 붙들려 있었고, 외출마저 자유롭지 않았다. 15~16세가 되면 결혼을 하던 시절이니 혼인을 미루고 공부할 수 있는 여성도 드물었다.

이화학당 창립자인 메리 스크랜턴 선교사. 이화여대 교목실 제공

스크랜턴 선교사는 1886년 5월 31일 여학생 한 명과 함께 학당을 시작했다. 이어 고아와 가난한 집안의 아이들을 불러 교실을 채워갔다. 학생이 7명까지 늘어난 1887년, 고종황제는 교명을 하사했다. 바로 ‘이화학당(梨花學堂)’이었다. 배꽃 핀 골에 세운 학당이란 뜻이었다. 이화는 왕후를 상징했는데 순결과 명랑이란 의미도 있었다. 이화학당은 여성에게 배움의 기회를 주지 않았던 오랜 관습을 깨고 여성 교육의 장을 활짝 열었다.

여성들의 권리를 확대하는 데도 선교사들의 공헌이 있었다. ‘ㄱ’자 형태의 예배당에서 남녀가 나뉘어 예배를 드리던 1895년, 스크랜턴 선교사의 아들인 윌리엄 스크랜턴은 작은 구멍을 통해 여성 해방의 물꼬를 텄다. 이른바 ‘휘장 세례’ 사건이다. 당시 남녀를 가르던 휘장은 오랜 세월 한국사회를 지배했던 가부장 질서를 상징했다. 윌리엄 스크랜턴은 휘장 한 가운데 머리 하나 통과할 정도로 작은 구멍을 내고 머리만 내민 여성 교인 전삼덕에게 세례를 줬다.

“휘장 세례는 봉건 사회 남녀 사이에 구분했던 그 벽이 무너진 대사건입니다. 세례를 받은 여성 중엔 처음으로 이름을 가지게 된 이들도 있습니다. 조선 시대 여성은 어릴 때는 ‘누구 누이’ ‘누구네 딸’로 불리다가 결혼하면 ‘마포댁’ ‘원주댁’이 됐고 아이를 낳으면 ‘아무개 엄마’로 살았어요.”

장윤재 이화여대 교수는 7일 국민일보와 통화에서 이렇게 말했다. 장 교수는 “여성들은 세례를 통해 비로소 마르다, 미리암 같은 이름을 받았다”며 “꽃님이, 점동이로 불리던 여성들이 세례를 통해 한 인격체로 서게 됐다. 선교사들의 세례는 여성들을 해방하는 근대 혁명의 시작이었다”고 평가했다.

1887년은 여성 의료 선교의 출발점이었다. 10월 31일, 한국 최초의 근대식 여성병원 ‘보구녀관(普救女館)’이 문을 열었다. 병원 이름에서 보(普)는 ‘보호’가 아닌 ‘보편’을 뜻하는데 모든 여성을 위한 병원이란 의미였다. 남성 의사들에게 진료를 받지 못하는 여성을 위해 메타 하워드 선교사를 비롯한 여성 의료 선교사들이 진료에 나섰다.

보구녀관은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의료인을 배출한 요람이기도 했다. 마가렛 에드먼즈 선교사는 1903년 보구녀관에 ‘간호원 양성학교’를 설립하고 1908년 첫 졸업생을 배출했다.

한동수 총신대 교수는 “첫 졸업생이었던 김마르다와 이그레이스는 오갈 데 없는 처지에서 보구녀관에서 치료를 받고 병원의 허드렛일을 하며 교육의 기회를 얻었고 마침내 간호원 양성학교를 통해 간호사가 됐다”며 “이들의 변화는 근대 의료교육이 소외된 여성들에게 준 새로운 희망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례”라고 설명했다.

한국 최초의 여성전용 병원이었던 1887년 보구녀관 전경. 이화여대 교목실 제공

조선 최초의 여의사도 선교사를 통해 양성됐다. 가난한 집 막내딸이던 김점동은 열 살에 이화학당에 입학한 뒤 12살에 세례를 받아 ‘에스더’라는 이름을 받았다. 박여선과 결혼하면서 이름을 박에스더로 바꾼 그는 로제타 홀 선교사의 도움으로 미국 유학 기회를 얻어 1896년에 볼티모어여자의과대학(현 존스홉킨스대)에서 공부한 뒤 1900년 의학사 학위를 받고 귀국했다.

첫 여성 의사였던 그는 서재필의 뒤를 이어 우리나라 두 번째 의사로 기록됐다. 1903년 평양 광혜원에서 본격적인 의료 활동을 시작한 그는 부임 후 10개월 동안 환자를 3000여명을 치료했는데 조선 사람들은 그가 수술하는 모습을 보고 “귀신이 재주를 부린다”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의료 사각지대에 있던 조선인을 보듬은 그는 훗날 홀 선교사가 설립한 한국 기독교 최초 장애인 특수학교 ‘맹아학교’에서도 교사로 일하며 장애인 교육에도 힘썼다.

선교 역사에서 선교사와 여성은 뗄 수 없는 동반자였다. 우리말과 문화에 생소했던 선교사들은 주로 과부나 30세 이상 미혼 여성을 ‘전도부인’으로 임명해 여성 전도에 힘썼다. 전도부인의 도입으로 사회적 역할이 제한된 여성들에겐 사회활동의 기회가, 외출이 자유롭지 못했던 여성들에겐 복음을 접할 통로가 열렸다.

여성의 존재를 일깨운 선교사들의 헌신은 세계 복음화의 새로운 토대로 이어졌다. 한국세계선교협의회(KWMA)와 한국선교연구원(KRIM)이 발표한 ‘2024 한국선교현황’을 보면 한국 국적의 장기 선교사 중엔 여성(52.3%)이 남성(47.7%)보다 많은 것으로 파악됐다. 장 교수는 “19세기 말 조선 여성들의 인권과 교육을 위해 헌신했던 선교사들의 밀알이 오늘날 전 세계 곳곳에서 복음을 전하는 수많은 한국 여성 선교사들의 열매로 맺어졌다”고 평가했다.

이현성 기자 sag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