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강영애 (5) ‘늦결혼’ 원하던 아버지 뜻과 달리 졸업 1년 만에 결혼

입력 2025-04-08 03:06
1956년 이화여자대학교 창립 70주년 기념행사. 이화여대 홈페이지 캡처

대학 졸업 후 나는 전남 영광의 한 중학교 교사로 가게 됐다. 하지만 이를 가장 반대한 사람은 다름 아닌 ‘딸 바보’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네가 굳이 밥 안 벌어먹어도 되는데 그런 시골은 절대 안 된다”면서 “내 딸은 어디에도 보낼 수 없다”며 강하게 반대했다. 금쪽같은 딸을 시골구석에 보낼 수 없다는 아버지의 완강한 뜻에 결국 나는 교사의 길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가끔 아버지의 사무실에 들르던 한 할아버지가 있었다. 늘 한복을 입고 흰 수염을 기른 그분은 나를 보더니 아버지에게 이렇게 말했다.

“저 딸은 공부를 많이 시켜야겠네. 시집은 늦게 보내고. 가야금을 튕기게 하게. 기와집 울타리 너머로 지나가는 사람들이 가야금 소리를 듣고 ‘저 집에 기생이 있나 보다’ 하고 오해할 정도로 말이야. 그래야 저 아이가 액땜을 하고 평탄하게 살 수 있어.”

아버지는 그 말을 듣고 내게 가야금을 가르쳤다. 전남 나주에 사는 가야금 선생님을 직접 모셔와 1년간 개인 지도를 받게 했다. 가야금을 배운 나는 친구가 교사로 있던 수피아여고에서 여름방학 동안 학생들에게 가야금을 가르치기도 했다. 하지만 그 할아버지 조언과는 반대로 나는 바로 이듬해에 결혼했다.

고등학교 시절 선배들은 육성회장이었던 아버지 덕분에 나를 ‘S동생’으로 삼고 싶어했다. 당시 ‘S동생’은 ‘스텝 시스터(Step Sister)’의 줄임말로 친자매처럼 지내는 언니나 동생을 뜻했다. 전쟁의 흔적이 남아 있던 시기, 우리에게는 그 또한 하나의 문화였다.

나와 스텝 시스터로 인연을 맺은 한 학년 선배 S언니는 학교에서 가장 똑똑한 리더이자, 전교생을 이끄는 중심인물이었다. 하지만 S언니 집은 딴판이었다. 오래된 초가집에, 앉을 자리조차 마땅하지 않았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논밭에 나가 일을 하며 간신히 생계를 이어가는 형편이었다. S언니는 의대에 합격하고도 집안 형편이 어려워 입학금을 낼 수 없었다. 나는 안타까운 마음에 아버지께 말씀드렸고, 등록금을 대신 내주셨다.

성인이 된 S언니가 한 건축사와 연애를 하게 됐는데, 그 건축사의 남동생이 우리가 고등학생 시절 함께 찍은 사진을 보게 됐다. 그는 사진 속 내 모습을 보고 호감을 느꼈다고 했다.

그는 방학 때마다 수기동 우리 집 근처에 자주 나타나 온종일 주위를 서성이곤 했다. 집안 일꾼들 사이에서 “남자가 자꾸 기웃거린다”며 수군거리는 말들이 오갔다. 그 이야기는 아버지 귀에까지 들어가고 말았다.

화가 난 아버지는 일꾼들에게 “작대기를 들고 쫓아내라”고 호통을 치셨다. 그런데도 그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 나를 따라다녔다. 결국 아버지는 “이러다 동네 웃음거리가 되겠다”며 체념하듯 말씀하셨다.

“그냥 결혼해라.”

대학을 졸업한 지 1년 만이었다. 가야금을 배우고 담 너머로 가야금 소리가 퍼지게 해 내 존재를 희미하게 해야 한다던 할아버지의 ‘액땜’ 이야기도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정리=박효진 기자 imher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