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에서] 확장된 치킨세가 덮친 세계

입력 2025-04-07 00:38

1970년대 후반 세상에 나온 일본 자동차 회사 스바루의 ‘브랫(BRAT)’은 가장 이상한 경트럭(light truck) 중 하나다. 픽업트럭의 모습을 하고 있으면서 외부 적재함에 두 개의 의자가 운전석과 반대 방향으로 설치돼 있었다. 지금 보면 어울리지 않는 외관과 달리 미국에서 꽤 인기 있었는지 1990년대까지 출시됐다. 일본차임에도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이 자신의 캘리포니아 농장에서 사용하는 모습이 포착되기도 했다. 브랫이 트럭이면서 승용차로 보이도록 만들어진 건 ‘치킨세(Chicken Tax)’를 회피하려는 목적이 컸다.

치킨세는 2차대전 후 미국 닭고기가 대거 유럽으로 수출된 후 등장했다. 신대륙으로부터 밀려드는 닭고기에 프랑스, 서독 등 양계 농가의 피해가 커지자 유럽과 미국 사이에 갈등이 불거졌다. 유럽이 미국산 닭고기에 대해 관세를 올리자 이번에는 미국이 강력 반발했다. 냉전이 한창이던 시절에 제임스 윌리엄 풀브라이트 미 상원 외교위원장이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회의에서 관세를 안 내리면 유럽의 미군을 줄이겠다고 엄포를 놨다. 존 F 케네디 암살 후 비행기에서 대통령 취임 선서를 한 린든 B 존슨이 취임 2주도 안 된 1963년 12월 3일 유럽산 감자전분, 브랜디 등과 함께 경트럭에 25% 보복 관세를 부과할 정도로 시급한 사안이었다.

이후 다른 관세는 사라졌고 경트럭에 대한 관세만 남아 치킨세로 불린다. 치킨세 부과 당시 폭스바겐 밴을 겨냥해 경트럭을 포함시켰는데, 이후 업계 로비 등으로 60년 넘게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다. 자유무역협정(FTA)을 맺은 국가도 예외는 아니어서 한·미 FTA 체결 당시 2021년 철폐 예정이던 치킨세는 ‘트럼프 1기’ 한·미 FTA 개정으로 2040년까지 연장됐다. 앞서 언급한 브랫은 경트럭이 아닌 승용차로 수입되면서 2.5%의 관세만 물어 성공적으로 치킨세를 우회한 드문 사례다. 미국에선 포드, GM, 스텔란티스(RAM) 같은 현지 브랜드가 픽업트럭 시장의 80%를 차지할 정도로 치킨세의 영향이 막강하다.

‘해방의 날(Liberation Day)’인 2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발표한 상호관세는 치킨세의 거대한 확장판으로 볼 수 있다. ‘네가 부과한 만큼 나도 부과한다’는 상호관세 취지와 무관하게 무차별적이고, 세부 관세율마저 관세가 아닌 적자 규모와 수출액 등으로 계산한 게 확인될 정도로 근거도 빈약하다. 여러 해 무역수지나 추세를 바탕으로 한 것도 아니고 지난해 무역수지만 가지고 세계 경제에 막대한 영향을 줄 관세를 부과할 수 있는지 아연할 뿐이다. 그날 트럼프 대통령이 계란값 안정에 공이 있다고 브룩 롤린스 농무부 장관을 치하하는 모습에선 희비극을 보는 느낌마저 들었다. 그 가격 안정이 자유무역으로 외국으로부터 수입한 계란에 어느 정도 빚지고 있고, 앞으론 관세 인상으로 그 수입 계란마저 가격이 올라갈 것이기 때문이다.

상호관세 정책에 대한 반박은 얼마든지 가능하지만 자유 대신 현실을 앞세우는 미국 앞에 실효성은 크지 않아 보인다. 경제와 안보 모두 미국과 매우 밀접하게 연관된 우리 입장에선 더욱 그렇다. 풀브라이트가 60년도 더 전에 통상 문제에 안보를 끌어왔듯 트럼프 2기 행정부가 우리를 압박하는 장면을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다. 이미 우리는 현실의 서늘한 한 단면도 지켜봤다. 미국의 대통령과 부통령이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 앞에서 “당신에겐 카드가 없다”고 하던 장면 말이다. 그간의 사정을 설명하는 젤렌스키 대통령의 말이 묵살당했듯 결국 얼마나 괜찮은 카드를 갖고 있느냐의 문제로 귀결될 것이다.

김현길 경제부 차장 hg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