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전 한국으로 유학 온 스물세 살 태국인 유학생. 가난하고 외로웠던 시절을 버티고 유학 생활을 이어갈 수 있던 건 한국인 목사 부부 덕분이었다. 조건 없이 나눠준 사랑으로 돌봄을 받아온 그는 한국에 사는 다문화 가정의 아이들을 돌보는 사역자라는 새로운 꿈을 꾸고 있다. 충남 천안의 한 태국인 교회에서 목사로 일하는 사만(33)은 최근 국민일보와의 통화에서 “저를 가족처럼 아껴주신 목사님 부부의 그 사랑을 나와 비슷한 처지의 이들에게 전하고 싶다”고 말했다.
스물세 살 유학생이 돌봄 주체로
사만에게 소명을 발견하게 해 준 이들은 경기도 평택의 외국인·다문화교육지원 비영리단체인 다모임한사랑센터를 4년째 운영하는 김현식(61) 목사와 김경순(58) 사모다. 김 목사 부부는 사만처럼 타지에서 어렵게 적응하는 이들을 돌보고 있다.
사만은 협성대 학부생 시절에 김 목사를 만났다. 그는 김 목사의 한국어 수업의 수강생이었다. 김 목사 부부는 그에게 선생님 그 이상이었다. 목회자를 꿈꾸는 사만의 신앙 선배이자, 학비가 없을 때는 함께 고민하며 방법을 찾던 인생 선배였다.
20대 초반의 유학생이었던 사만은 돌봄 받기에만 익숙했다. 그러나 김 목사 부부를 만나며 변화하기 시작했다. 김 목사 부부는 그에게 다문화 아이들을 위한 선생님이 돼달라 부탁했다. 협성대에서 성악을 전공한 사만은 다모임한사랑센터에서 음악 수업을 맡아 기타 등을 가르쳤다. 이주민이라는 공통점을 가진 어린 학생들에게 사만은 마음을 알아주는 형(오빠)이 됐다. 돌봄 받던 이가 돌보는 이로 성장하게 된 것이다.
그렇게 1년 6개월간 아이들과 동고동락하며 사만은 한국의 이주민 아이들을 위해 사역하고 싶다는 비전을 품게 됐다. 이후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사만은 “이곳에서 아이들을 만나면서 한국에 소속감을 느끼지 못해 방황하는 경우가 많고, 그렇기에 그들을 위한 사역이 절실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고 했다.
아프리카부터 아시아까지… 다름을 품다
현재 다모임한사랑센터엔 사만과 같은 아이들 40명이 함께하고 있다. 지난 3일 기자가 찾은 센터에는 나이지리아 케냐 부룬디 콩고 등 아프리카부터 베트남 중국 러시아 등 다양한 국적의 아이들로 북적였다. 아이들의 연령도 초등학교 저학년부터 고등학교 3학년까지 다양했다. 언어와 문화 나이가 다른 아이들은 서로 돕고 돌보는 데 스스럼없었다.
카메룬 국적의 어머니와 나이지리아 국적의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10살 디바인이 그랬다. 1년 전 가나에서 온 동갑내기 친구 로이의 통역을 자청했다. 디바인은 한국인 선생님이 전한 한국어를 다른 친구에게 영어로 전달했다. 그는 기자에게 “센터의 다른 친구들, 언니 오빠들은 내가 수학 등 어려운 과목을 힘들어할 때 많이 도와준다”라며 “로이와 같은 학교에 다니고 있다. 학교생활을 빨리 적응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어 기쁘다”고 웃었다.
다모임한사랑센터엔 다양한 모습으로 도움의 손길이 닿고 있다. 평택 지산동 행정복지센터는 정기적으로 김치, 된장, 쌀 등 반찬을 지원해 주고 있다. 국어 수학 등 센터 아이들을 위해 수업으로 도움을 주는 이들도 있다. 퇴직공무원 모임인 상록자원봉사단이다. 고등학교 수학교사로 은퇴한 박성열(66) 장로도 이 중 한 사람이다. 김 사모는 “박 장로님 외에도 아이들 소식을 듣고 재능기부를 자원한 집사님 등 많은 손길이 있었다”면서 “센터 인테리어를 도맡아 해주신 분도 있고 크리스마스 어린이날 행사에 아이들에게 선물을 전하시는 분들도 있다”고 했다.
서로 돌보는 마음이 이어온 4년
다문화 아이들을 품는 것은 김 목사 부부의 인생 계획에 원래 없던 일이었다. 톈진 등 중국에서 20년 넘게 선교하던 부부는 2014년 중국 당국으로부터 추방 명령을 받은 뒤 한국으로 돌아와야만 했다. 이후 김 목사는 경기도 평택의 송탄중앙병원 원목으로 일하면서 주중에는 외국인 선교, 주일에는 노동자 사역을 했다. 다문화 아이들과의 인연은 자연스레 이어졌다. 지난해 12월 기준 평택의 외국인 인구는 4만6000명으로 전국 지자체 중 여덟 번째로 많다. 김 목사가 2020년 이 지역에 세운 교회엔 이주민 아이들이 모여들었다. 김 사모는 부모가 늦게 들어와 혼자 끼니를 해결해야 하는 아이들에게 밥을 챙겨주고 김 목사는 이동수단이 마땅하지 않은 아이들을 차로 데려다 줬다. 교회로 시작한 공간은 돌봄이 필요한 이주민 아이들을 위한 사랑방이 됐다. 그리고 이제는 동네에 없어서는 안 될 다문화청소년센터로 자리매김했다.
김 목사는 센터 운영이 이어질 수 있었던 건 서로 돌보는 이들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우리가 낮은 자를 돌보겠다는 마음을 품으니, 알지도 못하는 이들이 생각지도 못한 방식으로 사랑을 나눠주며 동역해 주셨다”면서 “목회자가 된 사만이나 센터에 오는 아이들, 수많은 돕는 손길처럼 서로를 돌보려는 마음이 없었다면 센터를 운영하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평택=박윤서 기자 pyun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