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법대로 했을 뿐이다”… ‘법피주의’ 전성기

입력 2025-04-08 00:31 수정 2025-04-08 00:31

그들의 이 주문은 이제 면죄부이자 전가의 보도가 됐다. 과거엔 위기를 수습하려는 자의 입에서 맨 끝에 어렵사리 나오는 말이었다면, 지금은 책임에서 도망치려는 자들이 제일 먼저 꺼내는 방패다.

한국 사회가 법피주의(法避主義)의 전면화로 치닫고 있다. 법피주의는 ‘법적 책임만 피하려는 태도’를 일컫는다. 법치주의의 가면을 쓴 기만이다. 윤리도, 공동체에 대한 염치도, 정치적 책임도 필요 없다. “불법 아니다”라는 한마디로 모두 정당화해댄다.

항상 존재했던 이 유혹을 예전엔 감히 실행에 옮기기 어려웠다. 사회, 정치, 문화적으로 그것을 제약하는 힘이 작동했기 때문이다. 오롯이 책임을 지려는 고위 공직자들의 명예도 종종 빛났다. 하지만 그 제약이 약해졌기에 법피주의는 기세등등하다.

두 장면이 떠오른다. 하나는 1961년 예루살렘 법정에서 재판받던 나치 전범 아돌프 아이히만의 말이다. “상관의 명령에 따랐을 뿐이다. 나는 법을 어기지 않았다.” 이를 가리켜 ‘악의 평범성’으로 명명했던 한나 아렌트의 머릿속 방점은 평범성의 괴력이었다.

다른 하나는 워터게이트 사건 장본인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의 1977년 말이다. “대통령이 한 일이라면 불법일 수 없다.” 망언이었다. 둘 다 법을 방패 삼아 인간의 책임을 부정한 순간이었다. 이 연장선상의 논리들이 지금 우리 사회 곳곳에서 반복된다.

배경은 단순치 않다. 첫째, 진영정치의 극단화다. 도덕적 일탈조차 ‘정치보복’으로 교묘히 포장하거나, 남의 잘못을 가리키며 자기 것을 퉁친다. 시민단체까지 이에 휘말리곤 한다. 둘째, 양심보다 생존 기술이 우선되는 정치 엘리트 구조다. 책임은 출세에 방해요, 버티기는 경력으로 보상된다. 명예는 낭만 정도로 치부한다. 셋째, 서사와 형식을 중시하는 미디어 환경도 한몫했다. 이미지, 숏폼, 자극이 대세일 때 “불법이냐?”는 콘텐츠가 훨씬 잘 팔린다. 도덕과 윤리는 복잡하고 말할수록 손해다. 법피주의의 다른 자생 기반들도 다양했다.

이런 구조 속에서 생계형 법피주의자들은 자연스럽게 뭉친다. 그들은 서로 안다. “내가 무너지면 너도 위험하다.” “책임은 실무자에게 넘기고 우린 시간을 번다.” 이들은 법 해석을 공유하고, 회피 기술을 전수하며, 생존 카르텔을 형성해 간다. 소위 법피아들의 활약을 국민은 자주 목도한다. 위헌법률심판제청 신청, 소송기록접수 통지서 수령거부, 선거법 개정안 발의 등으로 대응하며 재판 시간을 끈다. 야당 대표는 법적 권리의 실천이라고 항변한다. 탄핵심판 서류 수취 거부, 체포영장 이의 신청, 헌법재판관 기피 신청, 체포적부심 청구, 구속취소 청구 등 전 대통령 측의 끝없는 법기술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큰 사달이 나도 법피주의자로부터 사퇴는커녕 진솔한 사과를 듣기조차 힘들다. 소임을 다하다 산화한 현장 공직자들과 너무 대비되니 냉소와 불신이 확산된다. 사회 전체는 ‘책임지면 손해’ ‘정직하면 바보’ 같은 메시지를 받게 된다. 공동체는 서서히 균열된다. 그래서 법피주의는 공정성과 사회통합을 갉아먹는 무척 교묘한 독성이다.

이제 법대로만 따질 것이 아니라 “무엇이 옳은가”를 묻자. 진정한 법치란 합법의 형식적 집합이 아니라 책임과 윤리를 담보하는 실질의 틀이어야 한다. 어떻게? 단순한 법률 한두 개 만들어서는 소용없다. 논어의 ‘군자구제기’(君子求諸己·스스로에게 잘못의 원인을 찾는 군자) 만들기 국민 캠페인이라도 벌여야겠다. 정치 구조, 가치관, 문화, 인사 등에서의 복합적 접근이 시급하다. 다만, ‘법적 책임’을 입에 달고 살거나 ‘남 잘못’으로 면죄부를 챙기려는 얼굴들은 유권자들이 또렷이 기억하자.

김일중 성균관대 경제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