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현덕의 AI Thinking] 위고비가 만들어 낸 덴마크 ‘소버린 AI’… 그리고 AI 주권

입력 2025-04-08 00:34

비만 치료제 성공, 산업 생태계 키워
AI 기반 국가관리체계 구축 이끌어
산업기반 지속 가능성 담보돼야 성공
한국형 소버린 AI도 일보 전진할 때

덴마크의 위고비는 비만 치료제로 세계적인 선풍을 일으켰다. 덴마크 제약사 노보 노디스크가 당뇨 치료제 오젬픽을 개발하다가 체중 감량 효과가 나타나는 바람에 위고비라는 새로운 브랜드로 출시해 큰 성공을 거뒀다. 흥미로운 점은 의도하지 않았는데도 뜻밖에 체중 감소 효과를 낳아 대박을 터뜨렸다는 점이다. 세상의 모든 성공은 기획 자체가 성공하는 것이 아니라 우연한 계기에 뜻밖의 세렌디피티를 만나 성공을 거두곤 한다. 심장질환 치료제를 개발하던 중 우연히 비아그라 효과를 발견한 화이자의 사례도 그중 하나다.

산업계가 탄생시킨 소버린 AI

필자가 생성형 인공지능(AI)으로 만든 덴마크와 한국의 ‘소버린 AI’ 이미지. 자국의 고유한 정체성과 다양성을 핵심 데이터로 보존하며, 외국과 조화롭게 공존하는 시스템이 핵심이다.

더욱 흥미로운 점은 노보 노디스크의 성공이 덴마크의 ‘소버린 인공지능(AI)’ 전략을 불러왔다는 점이다. 오젬픽과 위고비의 세계적 성공은 덴마크 경제와 바이오·헬스 산업 성장에 크게 기여했다. 그 결과 덴마크 정부는 AI 기반 신약 개발과 의료 데이터를 국가의 자산으로 보호할 필요성을 인식하고 국가 관리체계를 구축하게 됐다.

소버린 AI는 글로벌 빅테크에 의존하지 않고 자국의 데이터와 인프라를 바탕으로 독자적인 AI 생태계를 구축하려는 전략적 의지를 담고 있다. 이 개념은 전통적인 군사·경제 중심의 국가 주권을 넘어 다양한 디지털 기술과 인프라가 정부, 행정, 시민, 플랫폼에서 상호 작용하는 ‘디지털 세계’를 전제한다. 특히 언어, 문화, 종교 등 자국의 고유한 정체성과 다양성을 AI 시스템의 핵심 데이터로 보존하며, 외국과 조화롭게 공존하는 AI 시스템 및 데이터 세트를 의미한다.

사실 AI·반도체 산업 육성 등은 소버린 AI라는 개념이 아니더라도 국가의 기술·산업 정책에 자연스럽게 포함된다. 하지만 소버린 AI는 기존 산업 경쟁력 강화 정책에 더해 패권국가에 대한 기술적 의존을 줄이고 자국의 데이터와 정체성을 강화한다는 목표 아래 자국의 언어 지원, 자체 거대언어모델(LLM) 개발, 국가의 AI 데이터 및 클라우드 인프라 보호 등을 하려 한다. 과거에는 글로벌 테크 기업이 주도했으나 소버린 AI 개념은 자국 데이터와 AI 시스템을 국가 차원에서 자체 구축하려는 것이다.

소버린 AI라는 국가 이데올로기

덴마크의 소버린 AI는 산업계에서 태동한 글로벌 성공을 계기로 의료 AI를 넘어 데이터 주권으로 확장된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이와 반대로 일본은 정부 주도 아래 토요타, 소니, NTT 등 대기업이 참여해 일본어 특화 LLM과 AI 반도체 기술을 개발하고 있다.

오늘날 AI에 국가 이데올로기라는 갑옷을 입힌 나라도 적지 않다. 이들은 국가 정체성, 자국의 언어·문화 보호, 지정학적 독립성 등을 핵심 이념으로 삼고 있다. 인도는 자국 고유의 언어·문화 맥락을 반영한 자체 AI 모델 크루트림을 개발해 디지털 자립을 추구하고 있다. 아랍에미리트는 국영 기업 G42를 통해 AI ‘팰콘’를 개발하면서 디지털 자립을 지향하고 있다. 그러나 화웨이, 텐센트와 전략적 협력을 맺고 독자적인 AI 칩 확보를 위해 MS, 엔비디아와 협력한다는 점은 아이러니다. 이는 AI 산업 육성에 필수적인 데이터, 알고리즘, 컴퓨팅 인프라, 인재 등이 자국 내에서만 확보되기 어렵기 때문에 ‘동맹과 독립’이라는 딜레마가 존재함을 보여준다. 지나치게 국수주의적 관점에서 소버린 AI를 추진할 경우 오히려 글로벌 기술 및 인재 확보에 제약이 생길 수 있다.

한편 프랑스는 미스트랄이라는 기업이 주도해 생성형 AI 모델 ‘르샤’를 내놓으며 챗GPT와 경쟁에 나섰다. 프랑스 정부는 AI 산업에 대한 적극적인 지원 정책을 펼치고 있으며, 유럽연합(EU) 차원의 AI 육성 및 소버린 AI 정책 수립에도 기여하고 있다. 미스트랄은 삼성전자, 엔비디아, 네이버 등으로부터 대규모 투자를 유치하며 글로벌 경쟁력 확보에도 박차를 가하고 있다.

소버린 AI의 성공과 지원 요건

소버린 AI가 성공하려면 산업 기반의 지속 가능성이 담보돼야 한다. 위로부터의 의도된 기획으로 국가 이데올로기에 호소하는 방식은 얼마나 지속 가능할 것인가. 실제로 산업계와 연결되지 않은 ‘위로부터의’ 소버린 AI가 성공한 사례는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소버린 AI가 성공하려면 먼저 목표와 기준을 명확히 정해야 한다. 즉 ①데이터 주권 보호, ②문화적·언어적 정체성 유지는 물론이고, ③자국의 LLM 기술과 모델 확보, ④산업적·경제적 성과, ⑤글로벌 경쟁력 확보라는 보다 실질적인 목표 달성이 중요하다.

현재 소버린 AI는 각국에서 유행을 타고 있지만 성패는 산업적 성과를 가지고 글로벌 시장 경쟁력을 확보하느냐에 달려 있다. 글로벌 정보기술(IT) 리서치 기업 가트너에 따르면 소버린 AI는 여전히 연구소나 혁신적인 기업에서 실험적 개발이 진행되는 단계(Innovation Trigger)에 지나지 않지만 현실은 발전 단계에 비해 과도한 기대(Peak of Inflated Expectations)를 받고 있다.

미국의 AI 기업은 빅테크든 스타트업이든 처음부터 글로벌 시장을 공략하고 있다. 오픈AI, 구글, 메타, 앤스로픽 등은 처음부터 세계 시장을 겨냥하기에 소버린 AI라는 개념을 굳이 강조하지 않는다. 만일 글로벌 AI가 되지 못했기에 소버린 AI를 추구한다면 이는 허무한 신기루가 될 것이다.

한국의 소버린 AI는 민간 기업 네이버가 주도하고 정부가 지원하는 구조다. 기술 인프라와 산업적 토대가 한국형 소버린 AI 구축의 핵심 주체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하지만 이제 한발 더 나아가야 할 때다. 글로벌 AI 시장에서 혁신의 리더로 우뚝 설 때 소버린 AI는 진정한 성공을 거둘 수 있을 것이다. 그럼 어떤 산업에서 세계를 선도할 것인가. 글로벌 AI 시장에서 위고비나 K팝처럼 차별화된 산업이나 킬러 콘텐츠는 무엇일까. 산업 연계 전략은? 이런 질문에 실행력으로 답하지 못한다면 소버린 AI는 지속 가능성을 잃고 구호성 이데올로기로 전락할 공산이 크다.

여현덕 KAIST-NYU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