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강영애 (4) 오래도록 우정 나눈 ‘7공주’ 친구들, 모두 대학 진학

입력 2025-04-07 03:07
강영애(앞줄 가운데) 목사가 1950년대 광주여고 시절 친구들과 함께 찍은 사진. 강 목사에게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사진으로, 오른쪽 아래에 ‘우연한 기회’라고 적혀 있다. 강 목사 제공

전쟁이 발발한 후 우리 가족은 광주 광산구 비아동으로 피난했다. 비아동은 광주 도심에서 직선거리로 약 10㎞ 떨어진 외곽 지역으로 걸어서 3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였다. 이곳은 아버지 친구의 고향이자 집성촌이었다.

우리는 사랑채를 빌려 머물렀다. 피난 생활 중에도 보리밥은 먹지 않았다. 전쟁이 끝난 뒤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도 특별한 어려움 없이 비교적 편안하게 지냈다.

내 곁에는 오래도록 마음을 나눈 여섯 명의 친구가 있었다. 우리는 ‘7공주’라 불렸는데 광주 시장의 딸, 철공소 사장의 딸, 소방서 서장의 딸, 무역업을 하는 집안의 딸 등 하나같이 광주에서 이름난 가정의 자녀들이었다. 이들 중엔 훗날 교사노조 위원장이 된 친구도, 대통령 영부인을 시누이로 두게 된 이도 있었다.

우리 ‘7공주’는 모두 대학에 진학했다. 나는 1954년 이화여대에 들어갔다. 국문학과로 입학했지만, 같은 대학 정치외교학과에 재학 중이던 사촌 언니의 영향을 받아 정치외교학과로 전과했다. 당시 정치외교학과의 학생 수는 대략 29명으로 기억된다.

제3대 국회의원 선거(1954년 5월 20일) 직후로 정치적으로 혼란스러웠던 때였다. 이화여대 총장은 김활란, 부총장은 박마리아였던 시기다. 당시 이화여대는 각종 행사에 학생들을 동원하며 이화여대 마크가 새겨진 한복을 단체로 입혔다. 한복은 부총장이 운영하던 공장에서 제작된 것이었다. 이때도 나는 남색 비로드로 만든 한복을 입었는데 김 총장이 내 한복을 보곤 “사치스럽다”며 타박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재학 시절 내 관심을 가장 끌었던 장소는 대강당 옆 오이밭에서 펼쳐지던 정치 토론장이었다. 이곳에선 학생들이 모여 자유롭게 정치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그 오이밭 토론에 참여했던 이들 가운데서 법관이나 정치인들이 나왔다. 나는 선배들 어깨너머에 조용히 앉아 귀동냥으로 이야기를 들었다. 매일같이 그 자리를 찾아가 구경하고 듣는 사이 나도 모르게 정무적인 감각이 길러졌다. 당시엔 그저 듣고 배우는 재미였지만 그 시절 배운 것들이 훗날 나를 움직이게 할 힘이 될 줄은 미처 몰랐다.

여름방학과 겨울방학이 되면 농촌봉사단에 참여했다. 이 봉사단을 우리는 ‘계몽반’이라 불렀다. 당시 이화인들은 자신들이 교육을 통해 받은 넓은 시야와 지식을 농촌의 여성들과 함께 나누고자 방학이 되면 농촌을 찾았다.

군청에서 소개해 준 마을에 머무르며 우리는 일주일 동안 주민들을 대상으로 교육과 의료 등 다양한 봉사 활동을 펼쳤다. 주된 교육은 “농사를 잘 지어야 곡물이 나고 곡물이 잘 나야 세금도 낼 수 있으며 그래야 다른 업종에 종사하는 사람들과 교환도 하며 살아갈 수 있다”는 식의 삶과 복지 대한 기본 개념을 전하는 것이었다.

대학 재학 중 오이밭 정치 토론장과 계몽반 활동은 국가와 개인의 역할에 대해 깊이 고민하게 만든 소중한 계기가 됐다.

정리=박효진 기자 imher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