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재판소는 1948년에 제정된 제헌 헌법에 따라 설립된 헌법위원회에서 유래했다. 당시엔 위헌법률심판만 있었으며, 탄핵은 국회 산하 탄핵재판소에서 맡았다. 헌법재판소로 이름이 바뀐 시기는 제2공화국 때다. 4·19혁명으로 이루어진 3차 헌법 개정에 따라 헌법재판소(헌재) 제도가 도입됐고, 이듬해 헌재법이 만들어졌다. 위헌법률심판뿐만 아니라 탄핵심판 등도 담당하게 됐다. 하지만 헌재는 구성 일보 직전에 5·16쿠데타로 사라졌다. 그 후 27년이 흐른 1988년 헌재는 6·10항쟁의 산물로 부활하게 됐다. 87년 9차 헌법 개정을 통해 헌재 제도가 다시 도입됐고, 이듬해 헌재법이 시행됐다. 그해 9월 재판관 9명이 임명되면서 헌재는 역사적인 탄생을 알렸다.
헌재는 초창기에는 청사도 없이 정동빌딩 2개 층을 빌려 더부살이를 했다. 지금의 재동 청사로 옮긴 것은 1993년이다. 초창기 헌재의 위상은 그다지 높지 않았다. 초기에는 파리만 날려 일부 재판관은 변호사들을 만나 사건을 부탁할 정도였다고 한다. 특히 재판관 중 3명을 대법원장이 지명하다보니 재판관 자체가 대법관 임명에서 밀린 사람들이 가는 자리로 인식됐다. 헌재가 헌법 제6장에 명시된 위헌법률심판, 탄핵심판, 정당해산심판, 권한쟁의심판, 헌법소원심판 등 다섯 가지의 재판 권한을 행사하면서 막강한 사법 권력으로 부상하기 시작한 것은 노무현정부 때다. 2004년 5월 노무현 대통령 탄핵심판 기각과 그해 10월 신행정수도특별법 위헌 결정을 거치며 헌재의 위상은 높아졌다. 2014년 통합진보당 해산심판, 2017년 3월 박근혜 대통령 파면 결정 등으로 이어지며 최고 사법기관으로 발돋움했다.
8년이 흐른 2025년 4월 윤석열 대통령이 헌재에서 다시 파면 선고를 받았다. 주문 낭독까지 22분이 걸렸다. 노 대통령(28분)보다 짧았고, 박 대통령(21분)보다 길었다. 21년 사이 세 차례나 현직 대통령 탄핵심판이 진행된 것은 우리 역사의 불행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악순환이 언제까지 되풀이되어야 하나.
김준동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