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야구는 기록의 스포츠로 불린다. 기록은 단순한 숫자를 의미하지 않는다. 켜켜이 쌓이면 선수의 인생과 팀의 역사가 된다. 한국 프로야구에서 이 기록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관리하는 이들이 한국야구위원회(KBO) 기록위원이다. 야구장 안에서 가장 객관적인 시선으로 경기를 지켜보며 사실 그대로를 기록하는 기록위원의 수장, 진철훈(49) KBO 기록위원장을 지난 1일 서울 강남구 KBO회관에서 만나 기록의 원칙과 중요성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다.
진 위원장은 “기록은 야구에서 5할(절반)을 차지한다고 생각한다”며 대번 기록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기록위원의 역할은 단순히 경기 기록을 남기는 것이 아니다. 기록은 곧 야구의 역사이고 수십 년 뒤에도 참고하는 자료가 된다. 기록을 바탕으로 야구의 흐름을 분석하고, 새로운 전략을 세우는 데도 활용된다. 기록은 야구를 더 풍부하게 만든다.
아울러 기록은 선수의 연봉 협상, 해외 진출, 구단의 방향성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이 때문에 기록위원은 경기 내내 한순간도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다. 진 위원장은 “야구 기록은 선수들의 인생과 직결된다. 기록위원의 단 한 번의 실수가 선수의 경력을 바꿀 수도 있기에 신중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기록위원은 어떤 일을 할까. 진 위원장은 두 가지 용어로 기록위원의 역할을 설명했다. 우선 안타, 득점, 승패 등 야구장에서 벌어지는 그대로의 역사를 기록하는 ‘스코어링’(scoring) 측면에서의 기록 업무가 있다. 또 기록이 모여 선수의 성적, 팀의 성적으로 남는 ‘레코딩’(recording)적인 의미에서의 기록과 데이터를 관리하는 일을 한다. 그는 “기록이 누적돼 ‘스탯(능력치)’이 되고 선수와 구단을 평가하는 지표가 된다”고 했다.
기록위원을 가장 괴롭게 하는 기록은 뭘까. 역시 경기 중 가장 많이 나오는 안타와 실책을 가르는 일이다. “성적에 직접 연결되는 것이어서 선수들이 제일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이 안타로 기록되느냐 실책이냐입니다. 어떻게 보면 타자보다도 평균자책점 관리가 중요한 투수들이 더 예민할 때가 있어요. 경기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상황이기 때문에 신중에 신중을 기해 결정합니다.”
프로야구 기록위원은 역사를 집필하는 사관과 같은 역할을 한다. 그래서 기록위원의 가장 중요한 덕목은 객관성과 일관성이다. 진 위원장은 “모든 기록은 감정을 배제하고 오직 경기에서 벌어진 사실을 기록해야 한다”면서 “기록은 곧 역사로 남기 때문에 작은 오류라도 있으면 안 된다. 혹시라도 오류가 발생하면 경기 이후 심의를 통해 반드시 바로 잡는다. 그렇지 않으면 기록에 왜곡이 생길 수 있고 프로야구 전체의 신뢰가 떨어질 수 있다”고 했다.
기록을 두고 선수와 감독의 항의를 받을 때도 있지만, 뚝심 있게 판단을 유지하는 결단력도 요구된다. 지금은 거의 사라졌으나 예전엔 기록에 불만 있는 선수들이 경기 중 기록실을 찾아와 격하게 항의하거나 불만을 표시하는 경우가 잦았다고 한다. 그럴 때도 기록위원은 중심을 잡아야 한다. 그는 “기록위원이 흔들리면 야구의 공정성이 무너질 수 있다는 사명감으로 일한다”고 했다.
2002년 3월부터 KBO 공식 기록위원이 된 그는 지난해까지 KBO리그 1960경기를 기록하며 한국 야구 역사와 함께 걸어왔다. 모든 경기가 쉽게 잊히지 않지만, 2017년 4월 29일 잠실 롯데-두산전은 특히 기억에 남아 있다. 몸이 편치 않았던 아버지가 아들의 1000번째 출장 경기를 축하하기 위해 경기장을 찾았다. 어떤 신기록 달성 경기나 기념할 만한 기록이 나온 경기보다 지금은 돌아가신 아버지가 경기장에 찾아와 축하해준 날을 떠올리며 그는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다.
기록위원의 출장 경기가 중요하듯 그는 선수의 기록 중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 역시 ‘경기 출장’을 꼽았다. 안타, 홈런, 다승도 의미가 있으나 “경기 출장은 선수의 몸 관리를 나타내는 지표이기 때문”이라고 그는 말했다. KBO리그 통산 최다 출장 기록은 현재도 주전으로 뛰고 있는 삼성 라이온즈의 포수 강민호가 보유하고 있다.
또 진 위원장은 중간계투진의 기록에 대한 보완점이 필요하다는 의견도 냈다. 현재는 이기고 있는 상황에서 올라온 투수가 한 이닝 또는 한 타자를 막아내기만 하면 홀드가 주어진다. 그러나 팽팽한 동점 상황에서 등판해 실점 없이 막아낸 투수에겐 아무런 기록도 주어지지 않는다. 승부가 한쪽으로 기울지 않고 동점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그는 “중간계투의 중요성이 점점 커지는 현대 야구의 트렌드에 맞게 불펜 투수 평가를 위한 새로운 지표가 필요하다”고 했다.
프로야구를 기록하는 기록위원은 현재 진 위원장 포함 16명이다. 잠시 현장을 떠나 있는 그를 제외한 15명이 그라운드에서 고군분투 중이다. 2인 1조로 10명이 시즌 내내 전국 5개 구장에서 벌어지는 1군 경기를 담당하고, 나머지 5명은 2군(퓨처스리그) 경기를 맡는다. 은퇴한 기록위원까지 합해도 44년 역사의 프로야구에 기록위원은 모두 31명뿐이다. 선택받은 이들만 경기장 가장 좋은 위치에서 ‘직관’(직접 관전)하며 역사를 남기는 셈이다.
진 위원장은 같은 야구인이지만 야구계에서 기록위원이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하는 것에 못내 아쉬움을 표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기록이 더 중요해지고 기계 장비의 도입으로 기록위원의 역할도 달라지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올 시즌 정식 도입된 피치클록이다. 피치클록은 제한 시간 안에 투수는 투구 동작을 취해야 하고 타자는 타석에 들어서야 하는 것을 말한다. 투수와 타자가 위반할 경우 각각 볼과 스트라이크를 준다. 기록위원은 경기 전 피치클록 작동 여부를 점검하는 것부터 경기 중 운영, 경기가 끝난 뒤 위반 현황을 관리하는 것까지 도맡는다. 기록 업무만 하던 것에서 경기에 좀 더 직접적으로 개입하는 역할로 변모한 것이다. 물론 더 바빠져 눈코 뜰 새가 없지만, 경기의 일원으로 참여한다는 자부심은 한층 올랐다.
기록위원은 안타, 볼넷, 득점 등 어느 것 하나 적을 게 없는 ‘깨끗한 기록지’가 5회까지 이어지면 초긴장 상태에 빠진다. 한국 프로야구 역사상 한 번도 나오지 않은 퍼펙트게임(선발 투수가 9이닝 동안 단 한 번의 출루도 허용하지 않고 승리 투수가 되는 경기) 기록이 나올 수도 있기 때문. 150년 역사의 미국 메이저리그(MLB)에서 퍼펙트게임은 24번 나왔고 일본에서도 16번 나왔다. KBO리그에서 9이닝 동안 투수가 볼넷 등 4사구만 허용한 노히트노런은 총 14번 있었다.
그는 “모든 기록위원은 퍼펙트게임 기록지 작성을 늘 꿈꾼다. 분업화가 심화한 현대 야구 특성상 퍼펙트게임이 달성되기 쉽지는 않지만, 현장으로 돌아가면 언젠가는 퍼펙트게임의 순간을 기록하고 싶다”며 웃었다.
김민영 기자 my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