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와 타협 거부한 대통령
정치탄핵 남발·입법폭주 野
재판 불신 키운 정치의 사법화
거리를 뒀어야 할 비정상을
용인하고 적응해온 탓에
결국 이 지경이 됐다
온 나라 둘로 갈라져 싸우는
진영 대결의 대립·분열만은
결코 익숙해지지 말아야
정치탄핵 남발·입법폭주 野
재판 불신 키운 정치의 사법화
거리를 뒀어야 할 비정상을
용인하고 적응해온 탓에
결국 이 지경이 됐다
온 나라 둘로 갈라져 싸우는
진영 대결의 대립·분열만은
결코 익숙해지지 말아야
처음엔 어리둥절했고, 곧이어 화가 치밀더니, 낭패감이 찾아왔던 것 같다. 지난해 12월 3일 난데없는 비상계엄은 비교적 편안한 하루를 보내던 내게 여러 감정을 휙휙 바꿔가며 들이밀었다. 이후 탄핵이니 하야니 하는 갈팡질팡 속에서 점점 불안해지고 왠지 우울한 날이 이어졌는데, 그 기분의 자리를 어느새 황당함과 어이없음이 차지했다. 8년 전 겪었던 대통령 탄핵 국면의 전개와 너무 다른 양상이 당황스러웠다. 권한대행의 대행이 등장하고, 관저에서 경찰과 경호처가 대치하는 식의 장면은 내 상상력의 범위를 벗어나 있었다.
그런데 거기까지였다. 역시 인간의 적응력은 탁월하다. 초유의 사태가 이어지니 처음이 처음 같지 않고, 말도 안 되는 일이 계속되니 말이 될지도 모른다 싶은, 다시 말해 ‘그런가보다’ 하는 심리 상태로 접어들었다. 초반의 숨 가쁘던 감정 기복은 어느덧 잦아들어, 이 글을 쓰려고 지난 넉 달을 떠올리다 한껏 무뎌진 내 위기감에 스스로 놀란 것 정도가 그나마 눈에 띄는 변화였을 것이다. 대통령을 탄핵하는 상황부터 정상일 수 없다. 제대로 된 나라라면 그럴 일이 벌어지지 말아야 한다. 엎질러졌으면 주워 담는 게 정상인데, 정치는 더 극렬히 싸워댔고, 그에 맞춰 거리에선 혐오와 폭력이 득세했다. 그리하여 온 나라가 둘로 갈라져 사실상 내전을 벌이는 이 거대한 비정상에 그런가보다 하며 나도 모르게 적응해가고 있었다.
어쩌면 분명한 거리를 둬야 할 것들에 우리가 너무 쉽게 익숙해져 이 지경이 됐을지도 모르겠다. 탄핵이란 용어가 법전에서 나와 현실 정치에 등장한 때를 기억한다. 노무현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국회를 통과한 2004년 3월 12일, 9시 뉴스 앵커의 첫마디는 “여러분, 얼마나 놀라셨습니까. 설마 그러랴 했습니다만… 탄핵안이 가결됐습니다”였다. 설마 하던 탄핵은 20년 만에 단식·삭발보다 자주 쓰이는 정치 수단이 됐다. 현 정부 들어 야당이 꺼낸 탄핵안 30건은 다 기억하기도 어려워 ‘또 하나보다’ 싶었고, 권한대행까지 탄핵한 마당엔 쌍탄핵·줄탄핵도 놀랍지 않았다. 바꿔 말하면, 한국 정치와 관전자들이 비정상에 그만큼 길들어왔다는 뜻이 된다.
과거의 정쟁은 주로 카메라 앞에서 하는 거였다. 의견은 늘 충돌하기에 험악한 모습이 연출돼도 막후에선 협상이 벌어지곤 했다. 지역감정이 진영 갈등으로 전환되며 대화와 타협이 차츰 자리를 잃다가 지난 정부에서 ‘입법 폭주’란 말이 등장했다. 선거법마저 일방 처리한 불통 정치는 윤석열 대통령이 야당 대표 만나기를 고집스럽게 거부한 대결 정치로 이어졌고, 결국 입법권과 거부권의 정면충돌을 낳았다. 민주주의의 정상적인 모습을 비정상이 하나둘 잠식할 때 경고음을 울리고 제동을 거는 기능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 탄핵 정국에 와서도 강행 입법과 거부권을 일상처럼 반복하고, 또 그런가보다 할 만큼 둔감해졌다.
이렇게 비정상을 용인해온 까닭에 예전 같으면 기우라 했을 문제를 우리는 지금 절박하게 걱정하고 있다. 정치의 사법화는 사법의 정치화를 불렀다. 정치로 풀 일을 법정에 가져가고 판결의 유불리에 재판부를 추켜세우거나 매도하며 정치색을 입혔다. 재판 불신이 커지면서 윤 대통령 구속취소에, 이재명 대표 무죄 판결에 판사의 출신과 성향을 찾아보게 됐다. 급기야 오늘 내려질 탄핵심판 결과의 불복 사태를 막으려 승복 선언을 촉구해야 하는 지경에 왔다. 정치의 사법화 문제가 제기된 건 오래전이다. 그 비정상에 곁을 내줬더니 눈덩이처럼 불어나 재판 승복의 지극히 상식적인 질서마저 흔들고 있다.
대통령 탄핵심판이 한창일 때 국민 통합의 호소가 담긴 어느 국회의원의 성명을 보면서 신선함을 느꼈던 기억이 남아 있다. 여야가 서로 비난을 쏟아내고 양분된 시위대가 위험수위를 넘나들었지만, 그때까지 ‘통합’을 입에 올린 정치인을 별로 보지 못했다. 지난 넉 달의 온갖 기이한 풍경 중 하나는 큰 싸움이 벌어졌는데 말리는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고, 나와도 울림을 얻지 못했다는 점이다. 원로, 종교, 학계, 지식인…. 우리 사회가 갈등을 겪을 때 조율과 중재의 역할을 해주던 이들도 왠지 존재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지난 정권의 조국 사태와 지난 대선의 대결을 거치면서 진영 싸움에 우리가 너무 익숙해져버린 것 아닌가 싶어 섬뜩함을 지우기 어렵다. 대립과 분열, 결코 적응해선 안 될 비정상이다.
태원준 논설위원 wjta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