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 한국이 싫어서

입력 2025-04-05 00:39

기획재정부가 최근 발표한 내년도 예산안 편성 지침에서 눈길을 끈 건 ‘재정의 지속 가능성이 우려된다’는 대목이었다. 사실 공무원이 아니라면 예산 편성 지침은 일반 국민과 별 상관이 없다. 그렇지만 재정이 바닥나는 건 얘기가 다르다. 과거 지침은 어땠는지 찾아보니 지난해는 ‘지속 가능성’과 관련된 언급이 두 번, 재작년은 한 번뿐이었다. 올해는 7번이었다.

이번 지침에는 ‘강도 높은 지출 구조조정’ 같은 표현과 함께 법에 지급 의무가 명시된 의무지출도 손을 대겠다는 내용이 담겼다. 흔히 “재정은 화수분이 아니다”(홍남기 전 경제부총리) 등의 표현을 쓰지만 지침을 본 이후로 이 말도 머지않아 옛말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지속 가능성은 현재가 미래에도 계속될 수 있는지를 묻는 개념이다. 요즘 논란이 되는 상당수 사안도 지속 가능성과 맞닿아 있다. 국민연금 개혁안도 결국 연금이 계속 유지될 수 있느냐의 문제다.

여러 개혁안이 연금을 더 내고 더 받거나, 혹은 더 내고 덜 받는 등의 시나리오를 담고 있지만 결국 연금이 바닥나는 결말은 똑같다. 고갈 속도를 늦추는 수준의 개혁에서는 ‘내가 더 희생하겠다’고 손들 의욕이 생기기 어렵다. 지속 가능성에 대한 불안은 곧장 희망의 상실로 이어진다.

요즘 많은 사람이 ‘한국을 떠나겠다’고 말하는 원인 중에는 한국 경제의 지속 가능성에 대한 걱정이 상당 부분 차지한다. 10년 전 출간된 소설가 장강명의 ‘한국이 싫어서’(2015)에서 20대 여성인 주인공은 자신의 행복을 찾아 직장과 가족 그리고 한국을 떠난다. 요즘 한국을 떠나는 이유는 이보다 생존 문제에 더 가깝다. 말 그대로 늙어가는 한국이 두려워서 떠난다.

얼마 전 우연히 만난 한 고위 공무원도 첫마디로 “요새 아들이 한국을 떠나겠다는 말을 아주 달고 산다”고 했다. 한때 지탄의 대상이었던 미국 원정출산도 이제는 웬만한 가임기 부부가 한 번쯤 고민하는 일이 됐다. 한국을 떠날 수만 있다면 떠나겠다는 마음을 품은 사람이 우리 상상보다 훨씬 많다는 방증일지 모른다.

한국 경제의 지속 가능성을 지금 당장 높이긴 어려우니 떠나는 사람부터 붙잡아야 한다는 말도 많다. 정책 부처에선 상속·증여세 개편이나 우수 인재에 대한 인센티브 확대 등을 대책으로 쏟아내고 있다. 세금을 줄여서 부유층의 해외 이탈을 막고 우수 인력을 금전으로 묶어보겠다는 것이다. 물론 역부족이라는 건 공직사회도 알고 국민도 안다. 다소 속도를 늦출지는 몰라도 이웃나라 일본을 보면 초고령화에 따른 경제 역동성 저하는 피하기 어렵다는 결론에 이른다.

정말 이대로 냄비 속에서 물이 끓어오르는 것을 지켜보는 수밖에 없는 걸까. 최근 한 경제관료는 일본 대장성(현 재무성) 출신 학자인 노구치 유키오 히토쓰바시대 명예교수의 저서 ‘1940년 체제’를 눈여겨봤다고 했다. 책 속 노구치 교수의 진단은 이렇다. 2차 세계대전 시기인 1940년 국가총동원 체제에 돌입한 일본은 패전 이후에도 1940년 체제를 기반으로 전후 부흥에 성공했다. 자원 배분을 국가가 통제하는 강력한 정책으로 50년간 눈부신 성장을 이어왔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1990년대를 정점으로 새로운 시대 변화에 대응하지 못한 일본 경제는 잃어버린 30년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노구치 교수는 “1940년 체제 예찬론은 결국 일본 경제의 ‘멍에’가 돼 아직도 21세기 일본의 구조적 대전환을 가로막고 있다”고 했다.

한국도 남의 나라 일이 아니다. 한강의 기적을 이끈 성공 공식은 무너진 지 오래다. 수출 주도의 경제 성장, 저임금·고강도 노동에 기댄 산업 경쟁력은 중국에 치이고 시대 변화에 밀려 과거의 영광이 됐다.

하지만 여전히 기존 성공 공식에 일말의 희망을 품는 것은 한국도 마찬가지다. 지속 가능성을 우려하는 데는 기존 시스템이 이어지길 바라는 마음이 바탕에 깔려 있다. 이 상태로는 뼈를 깎는 혁신도, 썩은 살을 도려내는 개혁도 어렵다.

지속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역설적으로 지속 가능성을 포기하는 선택을 내릴 수 있을 것인가. 노구치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일본의 실수가 주는 교훈은 간단하면서도 어렵다. 과거의 영광에 취하지 말 것, 세계적 변화에 민감할 것. (중략) 역사 속에서 우리가 어디쯤 있는지를 항상 생각할 것.”


양민철 경제부 기자 listen@kmib.co.kr